한국일보

‘선의’에서 ‘시스템’으로

2019-09-11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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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의 거센 반발과 부정적 여론 속에서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대통령으로서는 고뇌에 찬 결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막바지까지 자진철회와 임명을 놓고 깊게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문 대통령은 조국 임명을 선택했다. 검찰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 판단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조국 임명 과정에서 검찰이 보인 무소불위 행태는 개혁의 시급함과 당위성을 대통령에게 한층 더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 같다.

조국 장관은 검찰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수처 신설안과 검경수사권 조정안의 뼈대를 세운 인물이다. 문 대통령은 조국 카드를 철회할 경우 검찰개혁은 아예 물 건너 갈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검찰을 선의로 대했다가 개혁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휘두른 칼에 찔린 뼈저린 경험이 있다.

사실 조국 검증 과정에서 검찰이 보인 태도는 비상식적이었다. 조국 일가 혐의를 수사 한답시고 특수부 검사 30여명을 투입해 곳곳을 압수수색하고 후보자 청문회 날 단 한 차례 소환도 없이 부인을 기소한 것은 장관 임명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행위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했다.


마치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빼어든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정작 소를 잡아야 할 상황에서 닭 잡는 칼을 꺼내 들고, 그나마도 미적거리던 얼마 전까지의 검찰을 기억하기에 당연히 ‘어떤 의도’를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순수한 동기로 보기 힘든 이유다.

문 대통령은 조국 장관을 임명하는 자리에서 “이제 남은 과제는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국민의 기관으로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것을 정권의 선의에만 맡기지 않고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대통령의 언급은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적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사회일수록 권력은 개인의 선의가 아닌 법과 제도, 즉 시스템에 의해 행사되기 때문이다.

선의에서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얼마나 잘 이뤄져 있는가는 한 국가와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가 된다. 가령 어떤 사회가 선의의 독지가들로 넘쳐난다면 그곳은 온정 가득한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비로운 독지가들이 많다고 해도 시스템으로 정착된 복지제도의 안정성을 앞설 수는 없다.

미국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총기문제 역시 그렇다. 현 총기규제 실태를 보면 거의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총을 구입할 수 있다. 총기협회의 입김에 시스템에 의한 규제는 무력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총기 소지자들의 선의와 이성적 판단에만 기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또 다른 총기참사를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선의 자체는 바람직하고 훌륭한 가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국가와 사회를 지탱해주는 토대로서 선의의 영향력은 너무 제한적이고 불안정하다. 과거 절대왕정시대에는 군주의 선의에 모든 것을 의존해야 했다. 다행히 ‘성군’을 만나면 백성들의 삶이 편안했지만 ‘폭군’을 만나게 되면 민생의 피폐와 고통이 뒤따랐다.

민주주의의 등장은 이런 불확실성을 크게 제거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곳곳에서는 여전히 통제받지 않는 권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과거 정권의 국정원이 그랬다. 검찰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두 손에 쥔 채 막강한 힘을 행사해 왔다. 국정원은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관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검찰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권력자와 수장의 선의만 바라보고 있기엔 검찰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런 검찰을 시스템에 의해 통제받는 기관으로 변모시키라는 것이 조국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주문인 것이다.

조국 임명 과정에서 야기된 혼란과 갈등은 기득권층의 반발과 부채질로 한층 더 확산되고 증폭된 측면이 있다. 지금의 조국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성급히 반응하기보다는 일단 장관으로서 조국의 행보와 검찰 수사를 지켜본 후 6개월 후 투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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