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기만 좋은게 아닌 새로운 경험 선사하는게 좋은 디자인”

2019-09-11 (수)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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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9달러 ‘가르보’ 휴지통으로 스타 가구·건축 등 3,000여 제품 디자인

▶ “자연의 유기적 부분서 많은 영감, 비싸거나 소수에 한정돼선 안돼...좋은 디자인 많아지면 세상 변화”

“보기만 좋은게 아닌 새로운 경험 선사하는게 좋은 디자인”

카림 라시드는 반팔 셔츠와 면바지, 운동화까지 흰색으로 맞춰 입었다. 다양한 문신을 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손톱에 하늘색과 검정색의 매니큐어를 칠한 그는 자신의 몸을 꾸미는 것도 디자인의 일부라고 했다. [이한호 기자]

“보기만 좋은게 아닌 새로운 경험 선사하는게 좋은 디자인”

캐나다 오타와 지역의 겨울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테이블과 의자. [보컨셉 제공]



나뭇잎을 닮은 봉긋한 삼각형의 의자, 새 다리처럼 앙상한 다리가 달린 테이블, 강물이 흐르는 듯 부드러운 곡선의 소파. 화려한 색과 관능적인 곡선의 디자인을 선보여온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59)가 덴마크 가구브랜드 보컨셉과 협업해 만든 ‘오타와 컬렉션(Ottawa Collection)’은 그의 기존 작품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핑크, 라임, 오렌지 등 형형색색 대신 검정색과 하얀색, 갈색과 회색 등을 주로 썼다. 기하학적인 패턴이나 물결치는 굴곡도 없다. ‘플라스틱의 왕자’라 불릴 만큼 다양한 형태의 플라스틱 제품을 선보여 왔지만, 이번에는 원목과 무독성 MDF(집성목재판) 등 친환경 소재를 사용했다.

최근 서울 청담동 보컨셉 매장에서 만난 라시드는 “겨울에 캐나다에서 덴마크로 가는 비행기에서 오타와를 내려다봤다”며 “앙상한 나뭇가지로 가득한 숲과 바위, 강물 등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쉽게 자연을 초록색이나 갈색으로 규정하지만 자연에는 곤충의 등처럼 금속 느낌이 나는 색도 있고, 모든 색이 다 있다”고도 했다. 자연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는 그는 “자연을 관찰해 보면 균형이 꼭 맞거나 자로 잰 듯한 직선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자연의 유기적이고, 부드럽고, 의도되지 않은 부분을 디자인에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반팔 셔츠와 면바지, 운동화까지 모두 흰색으로 맞춰 입은 라시드는 흰색을 예찬하기도 했다. 그는 “흰색은 모든 색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반사하기도 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색”이라고 말했다.


라시드를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로 만들어 준 일등공신은 9달러짜리 ‘가르보’ 휴지통(1996년)이다. 플라스틱을 제조하는 기계에서 플라스틱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디자인했다. 음료 등을 버릴 때 액체가 모서리에 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을 둥글게 했고, 휴지통을 비울 때 쓰레기가 손에 닿지 않도록 손잡이 부분을 위로 끌어당겼다. 1930년대 할리우드 스타 그레타 가르보(1905~1990)의 이름을 딴 휴지통은 전 세계에서 현재까지 1,200만개가 판매됐다. 그는 이 휴지통을 자신이 한 가장 성공적인 디자인 중 하나로 꼽았다. 라시드는 “사람들은 내가 아름다운 곡선이나 색을 디자인한다고 생각하지만, 형태에 중점을 두고 디자인했을 때는 정작 성공하지 못했다”며 “결국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쓰기 편안하고, 유용한 디자인의 제품을 원한다”고 말했다.

휴지통 같은 생활용품에서부터 가구, 휴대폰, 건축에 이르기까지 그의 디자인은 경계가 없다. 지금까지 3M, 아우디, 겐조, 랄프로렌, 시세이도, 삼성, 소니 등의 3,000여 제품을 디자인했고, 국제디자인상을 300회 넘게 받았다. 한국에서도 쉽게 그가 디자인한 제품을 찾을 수 있다. 파리바게뜨의 ‘오(EAUㆍ프랑스어로 물)’ 생수병을 비롯해 애경 주방세제 ‘순샘 버블’, LG생활건강 ‘이자녹스 셀리언스’ 등이 대표적이다. 반도건설이 경기 화성시 동탄 신도시에 짓고 있는 복합상가 ‘카림 애비뉴’를 디자인하고 있다. 라시드는 “디자인은 단지 보기 좋은 게 아니라 인간의 경험의 형태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휴지통을 디자인하는 것과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은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지 못한다면 실패한 디자인”이라며 “좋은 디자인 제품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좋아질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대중적인 디자인을 많이 선보이면서 ‘디자인 민주주의’를 주장해온 라시드의 디자인 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는 “좋은 디자인이란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주고, 그러면서도 비싸거나 한정돼서도 안 되는, 소수보다는 대중에 가까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유럽의 한 호텔을 디자인하고 있다. 이 호텔의 하룻밤 숙박료는 40달러 안팎. 그는 “돈이 없다고 디자인으로 좋은 경험을 할 기회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소유하지 않고도 좋은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좋은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1933년 나온 1회용 종이컵이 바꾼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세요. 역사를 이끌어온 발명과 디자인의 경계는 매우 가깝습니다.”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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