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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2019-08-16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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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은 아니었다. 베를리오즈(1803-1869)의 음악들이 대체로 연주회용인데다 대곡들이 많아서 집에서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음반보다는 오히려youtube 등을 통해 연주 실황을 보는 것이 훨씬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특히 ‘레퀴엠’ 같은 곡은 베를리오즈가 누구인가를 엿볼 수 있는, 그의 대표작이기도했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의 극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을 듣고 베토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돌아왔다고 외쳤다고 한다. 베를리오즈는 낭만파 작곡가 중에서도 미완의 천재에 속한다. 그가 미완으로 남은 것은 그가 미숙하거나 작곡을 하다 말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과속 스캔들 때문이었다. 즉 너무 앞서 나갔기 때문에 완성도 측면에서, 그의 음악을 정의할만한 사람이 동시대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베를리오즈야말로 낭만파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엉뚱한 행동으로 앞서 나갔던 괴짜 중의 괴짜였는데, 나와 베를리오즈의 만남도 그의 음악처럼 거꾸로 된 만남이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 잘 듣지 않았던 카라얀 지휘로 어느날 ‘환상 교향곡’ 실황 중계를 듣고 베를리오즈의 열광적인 팬이 된 것도 아이러니였지만 그의 대표작 ‘레퀴엠’ 역시 전혀 듣지 않다가 최근에야 접하고 감동해 마지 않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거꾸로된 만남이라 아니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아무튼 베를리오즈는 그 자신부터가 처음에는 음악가가 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베를리오즈는 어린 시절 음악과 담을 쌓고 살았고 음악을 독학으로 공부했던 무소륵스키 조차도 어린 시절에는 피아노 정도는 배웠는데 베를리오즈는 평생 피아노를 손도 대지 못했던 연주의 문외한(?) 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명으로 남게된 것도 아이러니였지만 의학공부를 하다가 오페라에 빠져 독학으로 공부, 파리 음악원에 합격하게 된 것도 상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였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어땠는지 몰라도 당시 힘들기로 유명했다는 로마대상을 받으면서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입증시켰는데 베를리오즈는 그 와중에도 당시 프랑스에서 한창이던 7월 혁명에 가담, 거리로 총 들고 나가 싸웠던 행동하는 양심(?)이기도 했다. 이런 베를리오즈에게 7월 혁명의 희생자들을 위한 ‘레퀴엠’ 작곡 의뢰가 들어온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베를리오즈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운명적인 기회를 최고의 작품으로 되갚을 기회로 삼고 심혈을 기울여 대작을 완성했는데 문제는 이 대작이 레퀴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화려했고 정서적인 측면에서나 연주회 규모면에서나 그 선을 넘었다는 데 있었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은 그 이름만 빼면 말러의 ‘천인 교향곡’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낭만파의 최고를 장식하는 화려하고 장엄한 곡 중의 하나였다. 오히려 ‘천인 교향곡’보다도 작품성에 있어서나 규모면에 있어서나 그 위상이 높았는데, 편성에 있어서 오케스트라가 무려 2백여명, 합창, 독창 합해서 210백명, 팀파니만 16대를 추가했고 더구나8명씩 금관악기 주자들을 동서남북으로 배치하게 해 그 어마어마한 규모 때문에 늘 지휘자와 연주자들 사이에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837년 프랑스 정부는 7월 혁명과 1835년에 발생한 루이 필립왕 암살미수사건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을 계획했는데 베를리오즈에게 이때 쓰일 레퀴엠을 담당하게 했다. 베를리오즈와 친분이 있던 내무장관 아드리안 가스파랑의 배려때문이었는데 베를리오즈은 이곡을 가스파랑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시일의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전에 써 놓았던 장엄미사 등을 가미하여 3개월만에 화려하고 장려한 레퀴엠을 완성했지만 행사 당일 갑자기 규모가 축소되는 바람에 이 곡은 계획대로 연주되지 못하고 5개월 뒤 앵발리드 대성당이라는 곳에서 육군 전몰장병 추도식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앞서 말했듯 팀파니 16대를 포함한 2백여 오케스트라 단원, 테너 독창자, 소프라노와 알토 80명, 테너 60명, 베이스 60명 등이다. 초연은 대성공이었지만 제 2곡 ‘진노의 날’ 등에서 굉음이 폭발하는 듯한 관현악 수법이 레퀴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론은 긍정적이었고 공연에 참석했던 뭇 시인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이한, 그러면서도 거칠고 충동적이며 애처로운 레퀴엠”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베를리오즈 자신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작품이 불태워져도 이 한 곡만큼은 보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선 당시 비난받았던 요소들 때문에 오히려 레퀴엠답지 않은 레퀴엠, 두 얼굴의 레퀴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가장 아름답고 개성있는, 레퀴엠 중의 레퀴엠으로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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