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는 누구일까?

2019-08-16 (금) 12:00:00 천양곡 /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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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따금 환자들한테서 듣는 질문이다.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그 사람’ 중에는 부모, 배우자, 친구, 친지도 있다.

거친 풍파를 헤치고 살아가며 때로 우리는 심리적 안정을 얻는 방법의 하나로 타인을 비난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정신과적으로 부정(Denial), 투사(Projection), 합리화가 뒤섞인 복잡한 방어기전이다. 일반적으로 의심, 불만, 오만에 가득 차있다.


이런 사람 대부분은 자아성찰, 자아발견, 감정조율에 문제가 많아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보통 ‘그 사람’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은 그와 다르다는 심리상태를 은근히 내비친다.

환자가 찾아오면 정신과의사는 얼굴표정을 살핀 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정신적, 심리적 상태를 깊이 관찰한다. 정신과의사가 교육과 경험을 통해 익힌 습관이다,

얼마 전 등이 구부정한 나이든 남자가 오피스로 찾아왔다. 머리가 거의 순백인 나를 보더니 마음이 놓이는지 언제 어디서 미국으로 왔느냐고 물었다. 거의 반세기 전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색을 하며 자기가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라 했다. 환자기록 란에 적힌 출생연도를 보니 당시 군인이 될 수 없는 나이였다.

일단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다음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방금 전 일상적 대화를 할 때는 명랑하고 활기가 있던 그는 여기 저기 아프다며 증상들을 말할 때는 병든 노인의 모습이었다. 내과에 가니 정신과의사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에 걸친 내과의사의 진찰, 많은 검사 소견에 별 이상이 없는데도 계속 신체적 증상을 호소하면 정신과에서는 신체형장애를 의심한다. 환자가 신체질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상태다. 심적 갈등, 불만, 분노와 스트레스가 발병원인으로 대부분의 경우 우울, 불안을 동반한다. 대표적 신체형장애 질환은 다음과 같다.

갑자기 팔다리가 마비되고, 말도 잘 못하고, 눈도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는 등 신경감각과 신경운동 기능의 저하를 나타내는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 전에는 히스테리아라 부름), 사소한 증상들이 계속되면 큰 병이 걸렸다고 걱정하는 건강염려증(Hypochondriasis), 신체에 조그만 흠이나 상처가 발견되면 자신의 몸이 달라지고 추한 모습으로 변했다고 낙담하는 신체이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 그리고 가장성장애(Factitious Disorder)와 꾀병(Malingering) 등이다.

가장성장애와 꾀병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증상을 만들어 내지만 자신이 병이 없음을 알고 있다. 꾀병은 금전적 보상을 원하거나 형벌을 피하고 어떤 의무와 칙임에서 벗어나려는 동기이고, 가장성장애는 타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자하는 심리적 보상의 동기를 보인다. 나머지 셋은 정말로 자신이 아픈 것으로 믿는 질환이다.


노인은 어렸을 때 부모와 행복한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긴 시간 일해야 했던 아버지는 집에 오면 맥주 몇 병 마시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불만인 듯 아이들을 잘 돌봐주지 않았다. 그가 어쩌다 아버지에게 말을 걸면 술 취한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며 밀쳐버리곤 했다. 그는 아버지가 무섭고 미웠다. 나중에 커서 힘센 남자가 되어 아버지를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해병대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역만리에서 공산군과 싸웠고, 제대 후에는 가정과 직장에서 능력 있고 힘센 남자로 살아 왔다고 했다. 그러다 70대 초 감기가 폐렴으로 번져 잠시 병원 신세를 졌는데, 폐렴이 낫고 나서도 계속 머리, 다리, 등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노인은 진정으로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병사였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왜 그랬을까? 신체화장애를 이해하려면 무의식의 존재를 전제로 한 정신역동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무의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꿈틀거리는 역동 상태다.

노인은 아마 폐렴에 걸리면서 자신이 약한 남자가 되었다는 슬픔, 부정, 분노, 회한 등을 무의식 속에 가둬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권위의 상징인 정신과의사를 만나자 어렸을 적 아버지가 떠올라 자신이 힘센 남자라는 무의식적 소망이 한국전 군인이었다는 거짓말로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거짓말, 거짓 행위를 일삼는 사람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120여년 전 프로이드가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하며 정신분석학 이론의 초석을 세웠고, 수많은 소설가들이 그들을 창작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또한 진화생물학자는 약육강식의 전쟁에 필요한 생존유전자를 찾기 위한 소재로도 사용하고 있다.

<천양곡 /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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