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판 카네기가로···” 대한민국 0.01% 위한 ‘맞춤코디’

2019-06-24 (월) 이혜진·조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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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VIP 자격?’ 예치금 30억은 넘어야죠, 한정·독점·검증된 상품으로 서비스 차별화

▶ 공연·교양 강좌·골프 행사는 기본 중 기본, 안전한 부의 대물림 위한 상속·증여 컨설팅

KB경영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한국부자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7년 말 기준 한국 부자(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개인)는 약 27만8,000명이다. 이들이 보유한 자산은 약 646조원으로 1인당 평균 23억원이 넘는다.

인구의 0.54%인 부자가 총 금융자산의 17.6%를 갖고 있는 셈이다. 가계자산에서 차지하는 부동산자산 등 비금융자산 비율이 60%에 달하기 때문에 이들의 전체 자산은 5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5년 전만 해도 10억원 이상인 자산가는 16만7,000명으로 보유 자산은 369조원이었다. 5년 만에 자산가 수는 66%, 보유 자산 규모는 75%가 뛰었다. 부자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이들이 소유한 자산은 더 가파르게 늘고 있다.

이처럼 늘어나는 고액자산가를 잡기 위해 금융회사들의 프라이빗뱅킹(PB)도 한층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PB들의 역량이 직접 IB딜을 조달하고 분석할 정도로 금융에 대한 지식이 과거와는 다른 수준으로 높아졌다. 회사 차원에서도 돈이 된다고 판단해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들여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춰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예치금 30억원’은 돼야 VVIP

과거에는 3억원 정도만 예치해도 ‘큰손’으로 우대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최소 5억~10억원은 돼야 VIP 대우를 받는다. 각종 특화 서비스가 제공되는 초고액자산가(VVIP) PB서비스는 최소 30억원 이상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다.

금융회사별로 예치 금액에 따라 고객등급에 차등을 두는 곳도 있고, ‘공식적으로는’ 최소 예치자산이 없다고 하는 금융사도 있다. 신한은행은 ‘부자의 등급’을 세분화한 경우다. 1억~3억원은 PWM라운지, 3억~50억원은 PWM센터, 50억원 이상은 PWM프리빌리지로 구분했다. KB국민은행의 스타PB센터, 삼성증권의 SNI는 30억원 이상을 예치한 고객을 대상으로 한다. KEB하나은행은 1억·5억·10억·30억원 이상으로 구분해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미래에셋대우·NH투자증권 등은 프리미엄PB센터 이용에 명시적인 금액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한 PB당 관리할 수 있는 고객이 제한적인데다 이곳에서 파는 금융상품의 최소가입 금액이 높다 보니 억 단위의 ‘소액(?)’ 투자자들까지 수용하기 힘들다고 한다. VVIP센터의 PB들은 보통 20명에서 많아야 50명 이내의 고객만 상대한다. 한 대형증권사의 PB는 “PB 입장에서는 유한한 시간을 소수 고객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며 “또 괜찮은 금융상품은 가입 금액이 건당 3억~10억원 수준이기 때문에 자산 규모가 수백억원 이상인 초고액자산가 위주로 영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모펀드 등 전용 투자상품으로 차별화

최근 PB서비스의 특징은 소수를 위한 사모 금융상품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좋은 종목을 추천한다거나 공모펀드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른 금융회사에 없는 좋은 투자상품을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경쟁력이 됐다. 본사 차원에서 국내외 우량 금융상품을 조달해와 공급하기도 하고, 지점 PB들이 고객의 수요와 성향에 맞게 사모상품을 만드는 경우도 흔하다.

삼성증권은 자산운용사들의 성과를 철저히 분석해 실력이 검증된 운용사의 펀드만 SNI 전용상품으로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대체투자 전문 운용사인 아이온자산운용의 펀드를 VVIP를 대상으로 팔았으며 앞으로는 세계적인 대체투자운용사인 블랙스톤 등에서 기관투자가 대상으로만 하는 펀드를 재구조화해 VVIP들에게 파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미래에셋대우도 본사 IB 부서에서 기관을 대상으로만 제공하는 투자 기회를 PB고객들에게 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홍콩과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오피스빌딩의 대출채권 유동화 상품을 최소 판매금액 5억~10억원으로 한정해 팔았다. PB지점 차원에서 비상장사나 실물 부동산에 대한 투자 건을 주선하기도 한다. 하나금융그룹의 클럽원센터가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PB들이 직접 기업의 재무 분석을 하고 투자심의를 진행한다. 전병국 하나금융 클럽원센터장은 “기관투자가에만 주어졌던 우량 투자 건에 대한 접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며 “처음에는 워낙 딜구조가 복잡해 선뜻 투자하기 힘들어했던 자산가들도 수차례 고수익을 올린 후에는 적극적으로 변모했다”고 설명했다.


◇승계 서비스·네트워크 제공도…

자녀 맞선까지 주선=VVIP들에게 제공하는 부가 혜택 중 각종 공연, 교양 강좌, 골프 행사 등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제 PB들은 자산가들의 최대 화두인 상속·증여, 네트워크 연결, 자녀의 취직과 결혼 관련 지원 서비스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자산가들의 주요 관심사는 ‘부의 안전한 대물림’인 상속·증여다. 특히 기업을 소유한 경우에는 가업승계에 대한 관심이 많다. PB서비스도 이에 가장 적극적이다. KB국민은행은 ‘KB家UP자문서비스’를 통해 유산정리·가업승계·기업매각 등 자산승계에 대한 종합적인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삼성증권도 가업승계연구소를 출범시키고 20명의 인력을 배치해 전체 VVIP고객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실시했다.

무형의 자산인 인적 네트워크를 마련해주는 것도 PB서비스의 한 축이 됐다.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자산가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녀들이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NH투자증권은 VVIP를 대상으로 100세 시대 인생대학이라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서울대와 공동으로 만든 이 프로그램은 세무·부동산·건강 관련 강의 등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연 2회씩 실시한다.

삼성증권의 넥스트CEO포럼도 입소문이 자자하다. 한 기수에 총 70명씩을 모집하는 데 시가총액 3,000억원 이상이거나 매출액이 3,000억원 이상인 기업 오너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경영수업을 하는 한편 이들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준다. 600명에 달하는 동문 간의 교류가 끈끈하다는 후문이다.

자산가 자녀의 결혼과 취직에 관심이 큰 만큼 연관 프로그램도 여럿 있다. 신한PWM에서는 고객 자녀들의 커플매칭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2006년부터 현재까지 39쌍의 성혼커플이 탄생하기도 했다. 거액자산가의 자녀에게 인턴 기회를 제공해주는 금융회사도 있다. A금융사는 회사에 수익기여도가 높은 고객들의 자녀 20여명을 매년 인턴으로 뽑아 국내뿐 아니라 해외법인에서의 근무 기회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경희 삼성증권 SNI본부장은 “개인의 자산관리를 넘어 기업의 승계나 자금운용까지 PB서비스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해외 선진국의 흐름”이라며 “베이비부머들이 은퇴 시점에 접어든 한국에서도 자산가들이 이런 서비스를 원하면서 PB 업계가 이에 부응해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본시장 이끄는 프라이빗뱅커
대한민국 초고액자산가(VVIP)들을 상대하는 프라이빗뱅커(PB)들은 대부분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들이다. 지난 2000년대 초반 국내에 자산관리라는 개념이 없을 당시 씨티은행 메릴린치증권 등 외국계 은행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증권사 지점에서 주식 매매를 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베테랑 PB가 되기도 한다. 국내 은행 중에서는 하나은행과 보람은행이 자산관리 비즈니스에 선도적으로 진출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는 삼성증권을 필두로 증권사들도 속속 발을 내딛으면서 PB들도 늘었다.

VVIP 대상 베테랑 PB들이 굴리는 돈은 얼마나 될까. 각 금융회사 톱클래스 PB들의 경우20~30명, 많아야 50명 이내의 고객만 담당한다. 소수의 고객이지만 이들이 보유한 자산이 워낙 크기 때문에 PB 한명당 2,000억~3,000억원, 많게는 1조원을 굴리기도 한다.
경력 30년의 김진곤 NH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강북센터 상무는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부자들의 자산 규모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며 “PB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PB들이 관리하는 돈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이들의 자금동원력은 막강하다. 최근 강성부 펀드 역시 강남권 PB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설명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 운용사 임원은 최근 공모펀드가 죽고 사모펀드가 대세인 상황에서 PB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운용사들이 설 곳이 없을 정도 라고 설명했다.

<이혜진·조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