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집을 나왔다. 부부싸움도 한몫 했겠지만 다만 며칠이라도 매인 데 없이 자유롭고 싶어 저지른 일이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던 일인데 두려움보다는 일종의 쾌감이 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던 생활. 그곳을 탈출한 작은 항거를 두고 쾌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건, 아직 저항할 힘이 남아있다는 반가움일지 모른다.
자유를 향한 의지는 동물로서 본능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지만, 막상 나오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두 시간 남짓 한 방향으로만 달렸는데 고맙게도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는 무척 넓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자 일단은 다음 여정을 선택할 일이 없다는 데 안도했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노라를 생각했다. 그 당시 많은 여성에게 갈채를 받으며 인형으로 살던 삶을 버리고 뛰쳐나간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없이 날갯짓을 해야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거라면, 온전한 자유란 푸른 하늘에서조차 꿈이다. 안에서 내다본 하늘과 실제 황야의 하늘은 얼마나 많이 다른가. 생존을 위한 날갯짓은 세상 어디서도 우아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다는 것을 노라는 알고 나갔을까.
‘행복한 줄 알았지 행복하지는 않았다’던 노라를 떠올리며 나의 삶을 생각했다. 결혼한 이래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있던가. 학교와 집을 쳇바퀴 돌듯 오가며, 퇴근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역할을 맡아야 했던 시간. 시댁과 친정, 가정과 직장, 그 안에서 이어지는 거미줄 같은 관계는 편안하면서도 때로는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로 여겨졌다.
내가 맡은 여러 역할이 버거울 때면 나 역시 노라처럼 태엽만 감아주면 움직이는 자동인형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며 정체성에 회의했다. 그간의 삶이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라고는 해도, 한정된 범위 내에서 주어진 것 중 하나를 골랐을 뿐 그 밖의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했던가 싶었다.
벗어놓은 빨래처럼 항상 누군가를 위해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야 하는 삶이었다. 그런 일상을 당연하다 여겼고, 내가 만든 규정에 나 스스로를 몰아넣으며 힘들어했다. 그러자니 나를 위한 시간이나 나만의 공간은 꿈꾸기 어려웠다. 한 달만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하는 게 내 나이 삼십 중반의 가장 절실한 바람이었다.
차창을 끝까지 내렸다. 밀고 들어오는 바람이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통쾌했다. 겉모습이 그렇게 흐트러질 수 있다는 건 안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조짐 같아 보였다. 내 젊음의 가장 빛나던 시간을 새장 안에서 보낸 것 같아 뭔지 모르게 억울하던 참인데, 바람이 구세주 같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을 닮은 야트막한 구릉들이 휙휙 지나가며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자 서늘한 바람이 등을 적셨다. 꼿꼿하게 서 있던 그림자들이 하나 둘 흔들리며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등도 없는 길을 소심하고 겁 많은 여자 혼자 정처 없이 달리고 있었다. 얼마든지 즐길 것 같던 끈 풀린 자유가 불과 한나절 만에 당혹스럽다니. 100년 전 노라의 용기를 떠올리며 나는 21세기 여자라고 외쳤다. 그러나 어둠이 찾아오니 갑자기 온 세상이 벼린 칼날을 숨긴 적군 같아 보이고 애초에 집을 나온 목적마저 가물거렸다.
환하게 불 밝힌 내 집을 떠난 지가 몇 년은 된 것 같고 그날이 그날 같던 권태로운 질서마저 그리웠다. 한 자리가 비어있는 휑한 식탁에서 두 남자가 맥없이 달그락거릴 젓가락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우리 집.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다 거기 있는데,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게 치밀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가족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설 것인가. 내 발로 집에 들어갈 일이 아득했고 구겨진 자존심이 애처로웠다. 밉상이던 남편이지만, 불러만 주면 못 이긴 체하고 들어가고 싶었다.
속박을 벗어나 세상을 훨훨 날겠다던 꿈. 그리도 간절히 바라던 자유란 게 고작 여기까지이던가. 바깥으로 뛰쳐나올 일이 아니라 내가 선 자리에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일, 그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속박한 것은 공간도, 시간도, 내가 맡은 역할도 아니다. 마음이 자유로우면 밧줄에 묶여도 자유롭고 마음이 묶이면 허공을 날아도 구속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깨닫게 한 하룻밤 가출은, 그러나, 살면서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멋진 파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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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