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상한 핑계

2019-05-23 (목) 12:00:00 신선영 / 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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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핑계로 밤새며 수다 세션을 펼쳤던 정든 도서관과 강의실을 뒤로하고 졸업사진을 찍는다. 시험이 다가오니 높은 힐을 벗고 안경을 챙겨 도서관 자리 전쟁에 동참해보기로 한다.

학기말이 되면, 특히 졸업할 시기가 되면 여기저기서 정리를 요구한다. 한 학기 동안 배운 얕고 넓은 지식을 요령껏 정리해보라는 교수님의 얼굴만 떠올려도 대학생의 학기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짐작해 볼만하다.

이맘때면 시험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놓고 옛 추억들을 곱씹으며 주변 사람들과 감사와 축하를 주고받으며 성숙하게 마무리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질러진 내 책상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너저분한 강의노트와 프린트물,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아쉬움과 후회의 편린들, 깔끔하지 못한 관계들… 무엇 하나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

학생으로서의 자아를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시간적, 공간적 경계에 갇혀있는 혼돈의 상태를 서양에서는 집단이나 개인이 다음 자아를 얻기 위해 존재하는 단계로 이해하는 반면 아프리카 요루바 사상은 이런 애매한 상태가 우리네 삶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불편함을 즐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서양적 관점에서는 이 경계가 필연적으로 다음 단계로 진입하게 해주는 통로일 뿐이라면 다른 문화권에서는 여러 자아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산더미 같은 빨래거리와 과제 노트에 머리가 아픈 오늘 나는 과감히 후자 편을 들며 고상한 핑계를 마무리 하고 싶다.

<신선영 / 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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