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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 나는 왜 차이코프스키를 듣는가?

2019-05-03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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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아야 다 좋다. 진정한 승자는 최후의 승자를 말한다. 분투하는 삶 속에서 누구나 승리를 원하지만 궁극적 승리란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자… 운명의 몫이다.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엔 패자가 있는가 하면 별 볼일 없이 보이지만 결국엔 승자인 자가 있다. 묵묵히 걷는다고해서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경쟁적으로 산다고해서 누구나 승리감을 맛보는 것도 아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려야하는, 그 현실적인 승리는 부조리일 뿐이다. 자기 극복, 애정의 문제, 출세, 인생의 도전은 무한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승자는 있을 수 없다. 승리란 어떤 의미에서 추상적이기 조차하다. 무엇이 진정한 승리일까? 승리는 오히려 어떤 절대적인 그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느끼는 좌절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자신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어떤 대상, 종교이든 예술이든 異姓이든 그 무언가를 만났을 때 그것이 주는 희열이 크면 클수록, 그로인해 작아지는 자신이 절망스러우면 절망스러울 수록 그 장벽을 넘어서려는 극복의 의지, 승리의 기쁨도 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가장 큰 절망을 느끼는 순간은 그러므로 패배한 순간 보다는 어떤 절대의 순간을 만났을 때 일지도 모른다. 청소년 시절, 나에게 어떤 승리를 예감시킨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음악 같은) 감동의 미학이었다. 누구나 방황하는 한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나의 경우는 특히 심했던 것 같다. 한 분야에서 진로를 결정하고 묵묵하게 그 길을 걷기에는 나는 너무 개성이 강했고 또 그 개성을 마음껏 휘두르며 살기에는 현실은 너무도 만만치 않았다. 건강의 문제, 학업의 문제… 뜻하지 않게 닥쳐왔던 이민 등 여러 현실적인 제한들은 영혼을 주눅들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떤 가치에 대한 대상이 높고 아름다울 수록 그것을 바라보는, 그리고 그 속으로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이 절망스럽고 우울했는지도 모른다. 둥글게 대충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은 결코 우울해지지 않는다. 음악,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열광했던 것도 그 어떤 현실의 장애를 뛰어 넘는 도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수에 차 있는 그의 음악을 통해 현실을 잊고 싶은, 미학적 도취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겨울하늘처럼 서늘했고, 북방 툰드라가 전해주는 듯한 짙은 우수의 그림자,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싱그러운 마치 진공 속으로 빨려들어가 듯한 순수함과 초월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지난 연말에는 오직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만을 들으면서 지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특정 음악에 대한 선호도를 떠나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유난히 가까이하면서 지내왔던 것 같다. 왜냐고 묻는다면 조금 대답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는 않지만 듣기에 편하고 독일 음악들 처럼 무겁지 않아서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는 (남다른) 우울함이 있기에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음악에는 우울함이 있기에 가슴에는 상처가 있고 상처가 있기에 또 그의 음악 속에는 극복과 승리가 있다. 베토벤이나 말러, 헨델같은 우렁찬 승리의 합창은 아니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는 우울함이 있기에 그 속에 승리의 행진곡이 주는 감동도 색다르다. 특히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교향곡들이야말로 미학적 가치에 있어서 인간 승리를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들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클래식 음악은 워낙 방대하여 그 좋아하는 선호도 역시 천차만별이겠지만 작품성이 있다고 꼭 만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대중적인 것이 모두 작품성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개의 모습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클래식이 주는 감동은 다른 그 어떤 예술 장르가 주는 감동보다도 강렬하다. 차이코프스키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만 특히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가장 매력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긴 작곡가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 외에는 아무 것도 성취한 것이 없었던 불행한 자였다. 결혼도 그랬고, (폰 메크 부인과의) 우정도 그랬고, 그 어떤 사랑도 모든 것이 미완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다소 우수에 차 있는 흠이 있었지만 그 또한 그만의 매력이었고 특히 ‘비창’처럼 어딘가 미완성적인 모습, 끝없이 어둠 속으로 잠적하고만 싶은 내면의 상처를 표현하여 갈채받았다. 아름답지만 비극적이고, 낭만적이지만 모호하게 어둠을 감싸안는 역설, 어떤 해답도 없이 보일 듯 말듯 밤길을 걷는 듯한 그 미완성적인 모습이 우리에게 더욱 다가오는 신비인지도 모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야말로 인생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그런 자기 극복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싱그러운 실존이 있었다. 절망을 노래한 만프레드, 비창 교향곡, 겨울 나그네처럼 쓸쓸한 교향곡 1번, 초극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5번, 이 세상에 도전과 극복 없는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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