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53)Watergate 민주당 사무실 잠입사건①

2019-04-08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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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Post 의 Ben Bradley 편집국장은 확실한 근거도 없이 Nixon 의 지시로 FCC (Federal Communication Commission) 가 Washington Post 가 신청한 방송면허를 발행해 주지 않는다고 “오해”하여서 그 “보복”으로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 Watergate 관계기사를 일면에 79회나 계재 하였었다고 한다. 최소한 보수쪽에서는 물타기 작전으로 그러한 주장을 했었다고 한다.

이 신문에는 대통령 선거를 한달정도 앞둔 10월 10일부터는 특종 심층취재 기자들인 Robert Woodward 와 Carl Bernstein 의 연재기사로써 “Watergate 잠입사건”이 단순한 잠입사건이 아니고 배후가 분명히 있는 “도의파괴적” 사건인 것으로 보도하여 정치계의 관심이 계속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이 두기자의 헌신적인 노력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는 일이 또 마침 발생앴다.

이 사건을 재판한 John Sirica 판사는 막중한 형량을 언도해내는 것으로 이름이 나있는 판사이었는데 그는 “Watergate 잠입사건”이 단순한 “잠입사건”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배후를 철저하게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는 법정에 출두한 범인들에게 만일 배후 “몸통”들에 대한 증거를 내어놓지 않으면 모두에게 종신형을 언도 할수가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Sirica 판사는 우선 범인들중 유일하게 배후실토를 거부하고 있던 G. Gordon Liddy 에게 20년 징역과 벌금 4만불을 언도하였는데 이 형량은 “아무것도 훔친것이 없고 체포될때에 경찰에 저항하지도 않았던 초범” 에게 주는 언도로서는 너무 막중한 것이었었다. Liddy 는 FBI 출신으로써 Plumber 에 발탁된 사람이었 는데 그가 감옥살이를 하도록 지정된 형무소는 죄수들간의 살인사건이 많이나는 악명 높은 곳으로써 그의 안전이 보장될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최대한의 압력이 가해진 것이었다.

만일 백악관의 배후연관이 밝혀진다면 그런 행위는 “Obstruction of Justice” (사법공무집행 방해죄) 로써 아주 중대한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제 “Watergate 사건”은 단순한 잠입사건이 아니라 엄청난 비중을 가진 “정치적사건”으로 격상이 되면서 미국이 것잡을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게 만들었다.

대표선수들이 판사에서 국회의원들로 바뀌게 되었으며 운동장도 법정에서 국회의사당으로 변했으며 운동규칙도 “형법” 에서 “정치재판인 (탄핵)” 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한가지 알아 두어야할 중요한 사실은 “탄핵”에 적용되는 기준 (예를 들어서 증거입증의 완전수위) 이 형사재판보다 훨씬 얕다는 것이다. 형사재판에서 “물증”이 없이 “심증” 만으로 유죄언도를 받아 내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대법원장이 사회를 보는 “탄핵재판소” 인 상원에서는 “물증”이 없이 “심증”만 으로 “유죄”판결을 낼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옛말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라는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볼때에는 말도 않되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 문구를 되새겨 보면 철학적으로 진리를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래 살다보면 “배보다 더 큰 배꼽” 이라는 말 이외에 더 맛이 있는 표현이 있을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더러 경험하게 된다.

아마도 미국정치 사상에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사건이 Watergate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Watergate 의 범법정도는 과거의 많은 대통령들이 해오던 “나쁜전통” 이었을 뿐인데 유독히 Nixon 만이 “witch hunting” (Trump 대통령이 최근에 즐겨쓰는 용어) 당한것 뿐이라고 일부 보수진영은 주장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Nixon 의 경우는 “범죄”와 함께 “범죄은폐” 죄가 더 큰 비중으로 다루어져서 배꼽이 배를 멸망 하도록 만든격이 되었었다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된후 1972년 5월말과 6월 17일에 Washington 에 있는 Watergate Building 안에 있는 민주당본부 사무실에 Plumber 들이 잠입하였었다. 두번째로 잠입 했다가 건물 경비원에게 발각된후 경찰에 Liddy등 다섯명이 체포 되었었다. Nixon 은 Florida 에서 주말을 보내던중 지방신문에 난 조그만 기사로 Watergate 잠입소식을 읽었 었다. 도대체 Plumber 들이 무슨 목적으로 민주당 본부에 잠입 했었는지는 그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상은 Nixon 을 지지하는 보수주의 진영에서 얼버무려 가며 Watergate 사건에 대해서 내어놓는 어설픈 주장이다. 진보진영의 주장이나 얼론에 보도된 것들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주장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아래의 얘기들이 Watergate 사건때 일어난 사실들과 더 부합하리 라고 생각된다.

월남전쟁도 종말이 다가왔고 Nixon 의 외교, 경제정책들이 좋은 결과들을 내고 있어서 선거운동을 무리없이 정상적으로 진행했더라도 충분히 승리할수 있었던 유리한
여건 속에서도 Nixon 진영은 극도로 긴장해서 승리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서두르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72년 1월에 당시 법무장관이 었던 John Mitchell 은 잠시후 장관직을 사직하고 Nixon 의 새선거운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한후에 Nixon 의 선거전략에 깊숙히 개입하기 시작했다. Plumber 들중의 한명이 불법적인 비밀 선거전략을 제안하였었다.

납치, 전화도청, 기타의 불법적 수단으로 민주당을 해치는데 100만불이 소용된다는 것이 었다. Mitchell 은 현직 법무부장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Plumber 의 제안이 “위법” 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고 자금이 너무 들어가기 때문에 실행될수 없다고 말하였었다.

그대신 Mitchell 과 선거참모들은 토의끝에 “25만불짜리”의 “정치정보 수집계획”을 세웠는데 참모들은 이계획이 자금의 낭비로 그치기 쉽고 매우 위험한일 이라고 우려도 하였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악관은 정적들이 무엇을 계획하고 추진해 오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 했었다.

이 정보수집작전중에 Watergate 건물내에 있는 Lawrence O’Brien 민주당 전국 위원장의 전화와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전화를 도청할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1972년 5월말에 Plumber 들이 사무실들에 들어가서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았으나 O’Brien 의 전화가 도청 되지 않았었다. 드디어 6월 16일밤에 도청장치를 다시 설치하려고 Watergate 사무실에 들어갔었던 Plumbers 다섯명이 건물경비원에게 발각되었고 그들은 모두 경찰에 체포 되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백악관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될수 있는 증거물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이들 Plumbers 와 공범일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을수도 있는일이 발생한 것이다.

Nixon 은 사실상 Watergate 잠입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듣자마자 그는 즉각적으로 죄책감이 없는 사람처럼 범죄를 은폐할 행동을 시작하였다. 범죄를 은폐하는 순간부터 Nixon 과 그의 부하들도 범죄를 하는것이 었었다. 이 “하찮은 범죄” 가 궁극적으로 일국의 대통령이 강제사퇴 할수밖에 없는국면으로 까지 확대될수있는 것임을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Nixon 은 비서관들에게 “CIA 가 FBI 에게 Watergate 잠입사건을 수사하지 않을것을 명령” 하도록 지시하였다. 수사중지 명령의 이유는 Watergate 잠입이 “국가안보”를 위한 작전이었음으로 FBI 가 개입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CIA 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CIA의 거부로 형편이 화급해진 Nixon 은 범인들을 함구시키기 위하여 1972년 9월 까지 그들에게 22만불을 지불하였다. Watergate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점차 사그러 드는듯 싶었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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