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한국과 첫 인연 ‘사죄와 화해 사절’ “대다수 일본인은 일제강점기의 참상 몰라…
▶ 역사의 진실 알면 한일관계 자연 풀릴 것”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서울일본인교회에서 요시다 고조 목사가 3·1절 100주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
일한친선선교협력회 소속 일본 개신교인들이 지난 2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제암교회에서 사죄의 절을 올리고 있다. <연합>
“4월15일은 제암리 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제의 만행을 상징하는 사건이죠. 사죄의 뜻으로 1970년 일본 교회와 사회단체가 성금 1,000만 엔을 모아 제암리에 새 교회를 지어줬습니다. 희생자 유족 마지막 한 분까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사죄하고 또 사죄해야죠."
서울일본인교회에 파송돼 39년째 사역하는 요시다 고조(吉田耕三·78) 목사는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절'로 불린다. 일본 개신교 신자나 학생이 방한하면 명승고적이나 쇼핑센터 대신 제암리를 비롯해 탑골공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독립기념관, 판문점 등으로 손을 잡아 이끈다.
요시다 목사는 일본 총리나 외무상·문부상이 바뀔 때마다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편지를 띄우고, 일본 유력 언론에도 수시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글을 보낸다. 연합뉴스는 지난달 29일 서울시 성수동 서울일본인교회에서 요시다 목사를 인텨뷰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개인 보상을 제외한 것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오만합니다.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초등학생이 쓴 편지에도 손수 답장한다는데 말이죠. 그래도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과 일본의 양심세력이 꾸준히 기도하고 항의하면 열매를 맺을 거라고 믿습니다."
요시다 목사가 맨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선교대회 ‘엑스플로 74'가 열린 1974년 8월이었다.
“경이롭고도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이 같은 한국 교회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의문을 품고 돌아갔다가 몇 차례 더 한국을 찾고 역사를 공부한 끝에 3·1운동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내렸죠. 민족을 말살하려는 혹독한 식민통치를 겪으면서도 평화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외친 경험이 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봅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차별을 겪은 경험을 묻자 “오히려 고마운 기억이 훨씬 많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내 야스코(泰子) 씨가 큰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교우들의 도움으로 완쾌됐고, 라디오 방송에 가족이 함께 초대돼 딸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선생님이 통역까지 데리고 와서 무료로 가르쳐줬다고 한다.
교회 운영은 일한친선선교협력회가 지원하며 헌금은 전액 한국교회순교자유족회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에 기부한다. 숙명여대 사학과에서 위안부 주제로 졸업논문을 쓴 큰딸 노리코 씨는 판문점을 보러 온 일본인 신학생 히라시마 노조미 씨와 결혼했다. 사위와 큰딸은 지금 서울일본인교회의 부목사와 전도사로 각각 일하고 있다. 작은딸 유카코 씨도 일본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돼 목사인 남편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다.
요시다 목사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일이 있다. 작은딸이 다닌 일본 니가타의 게이와가쿠엔(敬和學園)고교 학생들이 1999년부터 여름방학 때 한국 역사체험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을 일제강점기 유적지로 안내하고 위안부 할머니 등을 만나게 해준다. 2002년에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배웅할 때 학생들이 느낀 점과 감사의 마음을 빼곡히 적은 태극기를 선물 받기도 했다.
“독도의 진실이나 일제강점기의 참상 등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 일본인은 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과 마주한다면 한일 관계도 잘 풀리리라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죠. 우리도 고난의 역사를 딛고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시다 목사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두 시선'(二つの視線)이 오는 29일 ‘한일간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 교류회'(가칭) 출범식을 겸한 제작발표회에서 소개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