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허공에 디딘 발

2019-03-22 (금) 김종하 부국장·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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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리스트’(Z-list)라는 게 있다고 한다. 하버드대에서 지원자들을 뽑을 때 불합격 대상이거나 대기자 명단에 해당하지만 1년 뒤 입학하는 조건으로 합격시켜주는 사례들에 은밀히 붙은 명칭이다. 그런데 이 Z-리스트에 올라 합격한 학생들의 상당수가 ‘레거시’(legacy), 즉 동문의 자녀나 친척이라는 의혹이 제기돼왔다.

대학 입학사정에서 이처럼 일종의 ‘우대’를 받는 지원자 부류 가운데는 이른바 ‘입학처장 관심 리스트’(Dean‘s Interest List)도 있다. 입학처장이 각 단과대학 고위 관계자나 학교 기금모금 담당자들의 ‘언질’ 또는 ‘부탁’을 받아 직접 챙기는 지원자들 명단이라고 한다. 이 명단에 오른 학생들의 합격률은 일반 지원자들에 비해 엄청 높은데, 거의 대다수가 대학에 거액을 낸 주요 기부자들의 가족이라는 것이다.

부유층 학부모들이 거액 뇌물을 주고 자녀를 체육특기생으로 명문대에 뒷문 입학시킨 미국 역사상 최대 입시부정 스캔들이 터져 나오자 과거에도 이런 논란이 드물지 않았다며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전한 내용이다. 특히 그 가운데 현 미국 대통령의 사위이자 백악관 고문인 제러드 쿠슈너를 향해 제기된 의혹도 자주 인용되는 사례의 하나다.


‘합격의 비용’(The Price of Admission)라는 책의 저자인 대니얼 골든은 뉴저지주 부동산 재벌 찰스 쿠슈너가 1998년 하버드대에 250만 달러를 기부한 것과 그의 아들 제러드의 그해 하버드대 입학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골든이 제러드가 졸업한 고등학교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그가 고교 시절 그리 뛰어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하버드대에 합격해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주요 명문대들이 학생 선발에 있어서 이른바 ‘레거시 우대’나 일종의 ‘기여 입학제’를 알게 모르게 운영해오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로 부모가 그 대학의 동문이거나 큰 기부금을 냈을 경우, 그 자녀들의 합격률이 일반 학생들보다 상당히 높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대학들이 “부모가 거액을 냈으니 합격”이라고 드러내놓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이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쌓은 실력으로 합격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학생들 중 누군가가 밀려나는 아픔을 겪었을 테지만, 상당수의 명문 사립대들에서는 ‘재량’이자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재정에 기여하는 ‘금수저’ 학생들을 은밀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터진 입시부정 스캔들은 관행을 넘어 그야말로 돈으로 대학 합격증을 사는 행위가 상상을 뛰어넘는 불법적이고 뻔뻔한 비리 형태로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어서 그 충격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 특히 필자처럼 이번에 대학에 가는 12학년 아이를 둔 학부모들, 그리고 합격자 발표 시즌을 맞아 맘 졸이고 있는 수험생 당사자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상심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 때문에 며칠 전 딸이 다니는 고교의 대입 카운슬러 교사가 학생들에게 보내온 장문의 이메일 메시지는 공감이 컸다.

“(이번 사태를 통해) 여러분이 마치 무시당한 느낌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스스로 축하해야 할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평생을 간직하게 될 정직한 노력을 쌓아왔음을 자축하세요. 실패를 맛봤다면 이를 딛고 일어서 더욱 강해졌음을 자축하세요. 기만을 당했다는 이유로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쌓아온 실력과 노력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궁극적으로 여러분들은 두 발로 굳게 딛고 서서 쌓아온 모든 것들을 통해 기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뇌물로 얻어낸 대학 합격증, 뒷문으로 이뤄낸 성취는 그저 허공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번에 드러난, 그리고 앞으로 추가 수사를 통해 더더욱 많이 드러날 입시비리의 사례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정직의 토대에 두 발 딛고 굳게 서서 이룬 노력이 당당한 이유다.

<김종하 부국장·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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