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자들을 향한 러브레터

2019-02-08 (금) 김종하 부국장·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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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프랑스에 가서 살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인이 될 수는 없다. 독일이나 터키, 일본에 가서 살아도 독일인, 터키인, 일본인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지구촌 어느 곳 출신이든지 미국에 와서 살게 되면 ‘아메리칸’이 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연설의 한 대목이다. 최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 ‘레이건의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연설은 이민자들에 대한 러브레터였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에 나온다. 자신의 임기 마지막 날인 1989년 1월19일 백악관에서 열린 ‘자유의 메달’ 시상식에서 그는 “제가 대통령으로서 하는 마지막 연설이니, 제가 사랑하는 이 나라에 대해 한 마디 꼭 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써보냈죠”라며 위와 같은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영상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와 ‘기회’를 찾아오는 이민자들이 미국을 끊임없이 일신시키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미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자 바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연설을 이어가며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임을 설파하고 있다.


골수 공화당원이자 냉전 종식을 이끈 ‘보수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레이건의 백악관 마지막 연설이 ‘이민자에 대한 헌사’였다는 점은 놀랍다. 그 후로 30년이 지난 지금 이른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는 또 다른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드러내고 있는 이민자들을 향한 인식과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이민자나 외국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의식이 여과 없이 드러나면서 당사자들이 곤욕을 치르는 상황이 이곳저곳에서 잇달아 불거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남부의 명문 듀크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보직 교수의 중국 출신 유학생 대상 이메일 발송 사건은 대학 내에 보이지 않게 자리 잡고 있는 인종차별적 문화가 근본 문제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중국에서 온 대학원생들이 학교 라운지에서 중국어로 떠들며 대화하는 걸 본 교수들이 이를 학과장에게 알리며 항의하자 학과장이 중국 출신 대학원생 전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학교에서는 중국어 아닌 영어만 사용하라”고 요구한 것은 표면적인 의도야 어떻든 결국 의식의 깊은 구석에 특정 민족 학생들에 대한 ‘편견’이나 나아가 ‘반감’과 같은 차별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이같은 이민자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현직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하면서 이민자들 때문에 범죄가 늘어나고 국경이 ‘무법천지’가 돼가고 있다는 식으로 선동에 가까운 주장을 펼치는 상황이 그만큼 이에 동조하는 미국인들 사이에 내재돼 있는 ‘이방인 혐오’와 ‘차별적 의식’이 광범위하다는 반증이어서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다시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로 돌아가보면, 그는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보다 나은 삶을 이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에 오는 이민자들이 단순한 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것을 넘어 미국적 가치와 문화에 온전히 ‘동화’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이민자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해야 한다는 그의 웅변은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공포증, 편협과 편견이 판치는 시대에 다시 곱씹어봐야 할 금언으로 다가온다.

“이 기회의 땅에 매번 새로 도착하는 이민자들로 인해 미국은 항상 에너지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치고 늘 첨단에 서서 전 세계를 새로운 프론티어로 리드하는, 늘 젊은 나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들 새로운 ‘아메리칸’에게 문을 걸어 잠근다면, 우리는 세계의 리더로서의 지위를 곧 잃고 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종하 부국장·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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