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정한 바람결에 세상사의 피로 씻기니 미소가 절로…

2019-02-08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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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ns Catalina Trail <하>

다정한 바람결에 세상사의 피로 씻기니 미소가 절로…

Little Harbor 를 배경으로 한 여성대원들.

다정한 바람결에 세상사의 피로 씻기니 미소가 절로…

Parsons Landing 의 경관.


제 2일

숙소 앞에 모인 대원이 모두 6명이다(05:30). Ali와 Kian부자가 어제의 행군으로 많이 피곤하여 오늘 하이킹을 포기했다. 이대로 숙소에 머물다가 Long Beach로 먼저 나가서 그곳에서 두 모녀를 기다리기로 한단다. 500년 전 사람인 Shakespeare가 만약 오늘을 살고 있다면 아마도 “Frailty, thy name is a man!” 이라는 현 시대에 걸맞는 대사를 남기지 않을런지.

6명의 대원으로 길을 떠난다(05:30). 오늘은 이곳 TCT 24마일 표지가 있는 Two Harbors에서 기산점인 Avalon항까지 24마일을 거꾸로 훑어가는 행로이다. 즉 ‘복어’로 친다면, 꼬리에서 시작하여 머리까지를 여기저기 꼬불꼬불 야금야금 핥아가며 그 맛을 음미하는 그런 하이킹인 것이다. 우리의 숙소가 거의 해수면 고도에 있기 때문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처음부터 가파른 오름길이 되풀이 된다.


헤드램프로 길을 밝히며 가뿐 숨을 몰아쉬기 30여 분만에 Gate와 Fence가 있는 곳에 이른다. 통과 후 다시 Lock을 하는 형식이다. 가축의 일탈을 막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Headlamp가 불필요할 무렵(06:30)에 서쪽 아래로 아마도 Two Harbors일 포구의 모습이 드러난다. 길의 방향이 바뀐다. 15분 정도를 또 나아가니 서쪽 저 아래로 ‘소라’의 남쪽 해안선이 눈에 들어 온다. 곧이어 얼기설기한 목재 지붕 아래 피크닉 테이블이 부착된 세련된 디자인의 전망대가 나온다(06:45). 저 아래로 펼쳐지는 드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선의 전망이 기억될 사진을 찍도록 발목을 잡는다.

이제부터는 섬의 남쪽 해안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이다. 비유하면 ‘복어’의 가느다란 꼬리에서 풍선처럼 불룩해지는 아랫배를 향하여 가고 있는 셈이다. TCT 의 마일마커 21을 지난다(07:11).

유난히 수려한 그림같은 포구가 나타난다(07:53). “Little Harbor”란다. 어제 일주했던 섬의 서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Parsons Landing이라고 하면, 오늘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섬의 동쪽에서 가장 빼어난 곳으로는 단연 이 Little Harbor가 회자된다고 선두를 걷던 Sunny가 부연한다.

포구를 향하여 내려간다. 유난히 Palm Tree가 많고 또 무성하다. 80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Pimu Tongva인들의 거주지였다는 안내판이 있다. 대원들 모두 정결한 분위기의 해변 백사장을 거닐어 본다. 아마도 다들 대자연의 절경이 주는 벅찬 환희감을 차분히 음미하는 것이리라(08:06). 잔잔한 하얀 거품을 만들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이 유순하고 유려하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몇몇 남녀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정황이다.
10대로 뵈는 소년 둘이서 백사장에 쪼그려 앉은 자세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이 둘이 여기에 있어 이곳의 아름다움이 더욱 생생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두 소년의 등장이 특히 이 Little Harbor라는 걸출한 무대의 화룡점정으로 마음에 각인된다.

정갈한 비경에서의 황홀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08:38). 한 마리 Bison이 푸른 풀을 뜯느라 여념이 없어 뵈는 정경을 지난다. 저 큰 덩치의 배를 채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로움이 따를 것인지를 가늠해 본다.

‘Big Springs Ridge Trail’이란 표지가 있는 길을 간다. 이 역시 TCT의 일부이다. 한걸음 한걸음 고도가 다시 높아짐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는 Little Harbor는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비춰진다. Bison 한 마리가 선인장과 잡풀이 우거진 도로변의 산기슭에 앉은 채로 우리를 바라 보고 있다. 사진을 찍고 싶지만 혹여 그를 자극할까 싶은 조심스런 마음이 들어, 종종 걸음으로 도망치듯 이 구간을 지난다(09:17). 풀을 뜯고 있는 Bison과, 내 쪽을 응시하고 있는 Bison은, 그 곁을 지날 때 느껴지는 긴장감의 정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는 선인장이 도처에 산재한다. Prickly Pear Cactus로 여겨지는데, 어제도 오늘도 발걸음이 지나고 눈길이 미치는 모든 곳에 편만해 있다. 이 섬을 Cactus Island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겠다.


Mile Marker 16을 지난다(09:45). 8마일을 온 셈이다. Empire Quarry Trail이란 표지가 있다(09:59). 푸른 바다가 바로 아래에서 펼쳐진다. 이제는 아마도 ‘복어’의 등 부분에 이르른 것이려니 한다. 15마일 표지를 지난다(10:11). 앞서 가던 네 여성들이 “Oh! Fifteen Mile!!!” 라며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사기왕성, 신바람에 싸인 아마조네스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함성은 매 마일표지에 이를 때마다 더욱 높아지는 기쁨의 환성으로 되풀이 된다. 거리를 좁혀가고 있는 것에 대한 원초적 기쁨과 성취감의 발산일 것이다. 두 여성 하이커와 마주친다. 14마일 표지에서 다시 또 원기왕성 의기투합한 함성을 듣는다(10:35). ‘Jeep Eco Tour’란 표지가 부착된 차량이 지나간다(10:42). 6명이 탑승해 있다.

‘Airport Loop Trail’ 표지가 있다. 13마일 지점을 지난다(10:58). 말을 타고 달리는 카우보이를 형상화한 장식을 세워놓은 Airport 입구에 들어선다. 간이역을 연상케 하는 미니 공항이고 시골 공항이다. 계류되어 있는 것은 당연히 소형 경비행기들이다. 스페인풍일 운치있는 건물의 레스토랑에서 각자 점심을 해결한다. 공항 구내의 정원 안에 자라고 있는 여러가지 식물들에 인식표가 부착되어 있어 흥미로운데, 주마간산 일별하고, 다시 행로에 나선다(12:19).

우뚝한 송수신탑으로 정수리를 장식하고 있는 격인 Black Jack Mountain을 왼쪽에 두고 Black Jack Campground를 향해 내려간다. 그런대로 푸르게 자라나 있는 수목들로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Campground에 들어선다(12:53). 식수를 보충할 수 있는 곳이나, 우리 모두는 충분한 물을 지녔다. 몸집이 큰 Bison 한 마리가 구내에서 무언가를 헤집는 듯한 행동거지로 이리 저리 어슬렁대고 있다. 이 녀석의 사진을 몇장 찍고, 다시 서둘러 일행을 뒤쫒아 간다.

여우 한 마리가 10m쯤의 거리를 두고 우리 곁을 지난다(13:07). 사실 여우라는 동물은 어릴적부터 숱하게 얘기를 들어와 꽤 친숙하게 느껴지는 존재지만, 이런 자연상태에서 제대로 실물을 보는 것은 아마도 이 섬에서의 어제와 오늘의 이 조우가 처음인 것 같다. Catalina섬에는 원래 여우가 많았나 보다. 1999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1300마리로 파악됐던 개체 중에 오직 100마리쯤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전담요원들을 두어 적극적인 복원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지금은 약 400마리로 늘어난 상황이라고 한다.
한국의 민간설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거개가 구미호니 사람을 홀리니 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미국에 이민을 와서 뒤늦게 한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수강한 ‘관상학’의 노강사께서 “여자란 누가 뭐래도 여우상이 단연 으뜸이란 말이야!” 라며 여우의 이미지를 최상격으로 치시던 말씀이 떠 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 여우의 말쑥한 몸피와 조신한 행동거지가 정겹게 귀엽게 느껴진다. 역시나 꼬리는 무척 길어 보이는 이 여우의 안녕을 기원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널찍한 고원을 오르는 중에 마일마커 9지점을 통과한다(13:42). 역시 여성대원들의 함성이 우렁차다. 8마일 지점(14:07), 7마일 지점(14:30)도 지난다. 함성, 또 함성! 예닐곱마리의 Bison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14:36). 200m 쯤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완만한 능선에 그들이 자리하고 있어 더없이 그림같은 분위기로 다가온다. 아니, 그들과의 거리가 적당히 멀기에, 내 마음이 그만큼 푸근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 것이다.

6마일 표지를 지난다(14:54). 자그마한 저수지를 지나니, 제법 청아한 소나무들이 있어 아늑한 정경을 보여주는 구릉형 초원에 말끔한 어린이놀이터 시설이 나타난다(15:02). 화장실이 있고 피크닉테이블이 있다. 성수기에 가족단위로 이곳을 찾는 분들을 위한 시설이겠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곳을 떠난다.

아주 먼 발치로 Avalon항의 일부가 보인다(15:41). 섬의 동쪽부, 즉 ‘복어’의 꼬리에서 시작하여 하복부, 척추부, 흉부를 거쳐 드디어 경부, 두부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4마일 표지에 또 한번의 함성(15:57)!! 어제에 이은 강행군으로 지칠만도 한데 다들 보무가 너무도 씩씩하다.

관광객을 태운 짚차가 우리를 스친다. 도로변에 깨끗한 화장실이 있고, ‘Lone Tree Trail’ 안내판이 있다(16:11). 절반쯤의 햇볕만을 가릴 수 있게 설계된 멋진 구조물이 나온다. ‘Hermit Gulch Trail’ 표지가 있고, 뭔가를 새긴 동판이 바위에 부착되어 있다(16:16).
이제 저 아래로 보이는 우리 긴 행로의 종착지인 Avalon항까지 단지 3마일쯤의 내리막 구간이 남았으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동판에 새겨진 내용을 나름대로 이해해 본다.
“광란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힘든 세상사를 잠시 접어 두고 - 무릇 세상사란 쓰고 고달픈 것들이 아니던가! - 이 섬 산정에 올라서면, 어느새 다정다감한 바람결들이 삶의 제반 번사를 말끔히 씻어 내어, 기꺼이 환한 내 미소를 되찾게 된다. 아, 인생이란 실로 달콤하고도 가치있는 것이리니! - Capt. Eddie Harrison, Nov 24, 1912 ~ Oct 10, 1992”

대충 이런 정도의 의미를 담은 글이겠는데, 이는 어쩌면 우리들의 이 TCT 하이킹의 의미도 제대로 잘 짚어주는 글이기도 하겠다. Captain이라니, 우리네 표현으로는 ‘뱃사람’으로 살았던 분이 남긴 소회인 셈이다. 추측컨대 누구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사신 분이었을 텐데, 결국 인간사회에서 보다는 대자연의 품이 있어 보다 평안한 삶, 달콤한 삶을 살아간다는 신념을 천명한 셈이다. 동양의 표현으로 하자면 ‘요산요수’의 삶을 찬미하는 그런 글이 아닐까 한다.

3마일 표지를 지난다(16:25). 2마일 표지가 있다(16:45). 곧이어 Avalon시가지에 들어선다. 독특한 분위기의 정결한 도시이다. 자동차가 아닌 전동카트가 일반대중의 교통수단인 듯한 이색적 정경이다. 좁은 시가지에서의 주민생활의 원활함을 기하고 또 청정한 대기를 훼손치 않으려는 배려가 깔린 참신한 정책일 것 같다.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환하게 불빛을 밝힌 Avalon항의 부두에 도착한다(17:30). Two Harbors에 입항한 것도 저녁이었는데, Avalon을 출항하는 것도 저녁이다. 다른 점이라면 Two Harbors는 어두운 시골 포구의 이미지였는데, 이곳 Avalon은 휘황한 도시의 이미지인 점이다.

Buffalo, Fox, Cactus의 섬, 어디를 가도 깨끗한 별유천지 Santa Catalina Island의 추억과 보람을 가득히 안은 우리들을 태우고, 어두운 바다를 안전하게 건넌 Catalina Express소속의 Ferry 는, Ali와 Kian 두 남자가 Fariba와 Mona 모녀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Long Beach항에 차분히 닻을 내린다(19:30).

정진옥 310-259-6022

http://blog.daum.net/yosanyosooo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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