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헤어는 짧게 자르면 젊고 활기차 보이며, 밝고 선명한 컬러의 옷과 잘 어울린다. [TSP모델 제공]
그레이 헤어가 트레이드 마크가된여성 지도자들. 강경화(위쪽부터) 외교부 장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총재, 재닛 옐런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얗게 변하는 머리카락은 지내온 세월의 소중한 훈장과도 같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구본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작가, 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채정희 주부, 한성옥 그림책협회장.
‘백자’ 연작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구본창(66)의 은발(銀髮)은 그의 작품을 닮았다. 사진 속 백자들은 빛이 바랬고 미세하게 얼룩져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깨끗하고 단아하다. 40대 때부터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했던 작가의 머리카락은 이제 반백에 가까워졌다. 셔츠와 재킷에 청바지를 주로 입는 그이지만, 흩날리는 은발에서 세월의 흔적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구 작가는 한번도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한 적이 없다.“염색 안 해도 멋있다고 하더라고요. 조금 더 젊고 깔끔해 보이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존중해주고 싶어요.” 옆으로 살짝 쓸어 넘긴 은발에서 어쩐지 백자의 품위가 보인다.
패션 아이콘이 된 그레이 헤어 ‘흰 머리’는 패션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제거 대상 1호였다. 외모 지상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나이 들어 보이는 흰 머리는 감추거나 솎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주민등록증 나이는 숨길 수 없지만, 흰 머리는 염색으로 감쪽같이 감출 수 있었다. 다만 젊어 보이는 대가로 염색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신체적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런 흰머리가 ‘그레이 헤어’라 불리며 패션 아이콘이 됐다.
그레이 헤어는 가학적인 미의 추구에 대한 반기이다. 굳이 가리고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적인 영역에서 불붙었던 그레이 헤어 열풍은 2017년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과 함께 공적인 영역으로까지 이어졌다. 외교부 역사상 첫 여성 장관이자 최초의 비 외무고시 출신 장관이라는 그의 이력과 함께 그의 헤어스타일도 파격으로 비쳐졌다. 그는 “무엇인가로 본 모습을 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젊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나이를 부끄러워했던 중ㆍ장년층이 그의 당당함에 열렬히 환호했다.
외국에서는 흰머리가 노화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벗은 지 오래다. ‘패션계의 교황’이라 불리는 칼 라거펠트 독일 디자이너를 비롯해,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재닛 옐런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등 세계를 무대 삼은 지도자들도 그레이 헤어를 당당히 고수한다.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는 “한국에서도 주변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그레이 헤어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다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패션계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아이콘”이라고 평가했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 10년 전부터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한성옥(62) 그림책협회장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좋아 염색을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머리가 허옇다면 그것도 나를 말해주는 것”이라며 “흰머리도 세월에 따라 나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 중 하나인데, 그 상태를 누리고 싶어서 굳이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짧고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은 그의 시원시원하고 자유로운 성격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 역시 주위에서 염색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그는 “염색하는 친구들 중에 염색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다”며 “대부분 젊고 예쁘게 보이고 싶고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염색을 하는데, 나는 염색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손주가 없지만 흰머리 탓에 종종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게 속상할 법도 한데 그는 “아이들이 진짜 정확하게 사람 나이를 본다”며 웃었다. 그는 “염색하러 미용실 자주 안 가도 되니 좋고, 두피를 상하게 하는 염색약 냄새에 시달리지 않아 좋다”며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두피 질환, 탈모 등 염색 부작용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도 그레이 헤어 바람의 요인이다. 주부 채정희(70)씨는 3개월에 한번씩 집에서 하던 염색을 중단했다. 채씨는 “염색을 계속 하다 보니 시력도 나빠지고 두피도 가려워지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느낌이 들었다”며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백발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그레이 헤어는 중후하면서도 성숙한 멋이 난다. 안희곤(55) 사월의 책 대표는 40대 때부터 흰머리가 났지만, 한번도 염색하지 않았다. 그는 흰 수염도 기른다. 그는 “아름다움에는 완숙함도 있고 자연스러움도 있다”며 “그런데 모두가 젊음을 아름답다고 숭배하는 문화가 거북해 염색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 대표는 종종 ‘나이 많은 어르신’ 대접을 받는다. 그는 “젊은 분들이 섞여 있는 독서 토론이나 동호회에 가면 ‘선생’ 대우를 받는다”며 “외모만 보고 나를 어려워하거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곤 해 살짝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 등에서 좌석을 양보해주거나 아이들이 그를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곤혹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그는 “대접 받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고, 그 나이에 맞는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레이 헤어에는 선명한 컬러 코디로 활기차게 있는 그대로의 멋을 추구한다 해도 ‘관리’는 필요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은발의 패셔니스타가 될 수 있다. 강진주 퍼스널이미지연구소 소장은 “머리 숱이나 길이, 매치하는 옷에 따라 그레이 헤어가 더 젊어 보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는 머리 길이를 짧게 연출하는 것을 그레이 헤어에 어울리는 스타일로 추천했다.
머리가 짧으면 숱이 많아 보이면서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고 한다. 또 파마를 하면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는 효과를 줄 수 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하는 박수홍씨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반대로 전문적이고 강인한 느낌을 주려면 강경화 장관처럼 곧은 단발이나 짧게 자른 커트 스타일을 추천한다.
그레이 헤어에는 노랑, 연두, 하늘, 오렌지 등 밝고 선명한 단색의 옷이 어울린다. 강 소장은 “머리카락이 밝은 색인데 무채색의 옷을 입으면 자칫 피곤해 보이거나 무기력해 보일 수 있다”며 “밝은 색을 입으면 활기차 보이고, 눈이나 입 등에 포인트 메이크업을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남성은 정장차림보다는 터틀넥이나 라운드 니트 등의 캐주얼 한 옷차림이 그레이 헤어와 더 잘 어울린다. 강 소장은 “그레이 헤어는 자연스러움을 상징하는 만큼 인위적 패션은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편안하게 입되 품격을 갖추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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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