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초컬릿 박스

2019-01-16 (수) 최은영 / 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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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메일 1통을 받았다. 3주 전 봤던 취업 면접에 대한 정중한 불합격 메일이었다. 그동안 했던 일과는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떨리는 마음으로 봤던, 11년만의 취업 면접이었다. 나의 전공이나 경력과는 무관한 일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실무 경험도 없던 나로서는 예상했던 결과이긴 했다. 게다가 이제 막 킨더에 들어간,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가 있는 지금, 합격을 해도 고민을 해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던 건 몇년 후 아이를 키우고 나서 닥칠 경력단절과 재취업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고 내가 했던 일과 전문지식의 가치는 그 변화와 함께 흘러가 버릴 것이다. 아이에게 매였던 몸이 자유로워졌을 때는 지나간 세월과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 두려움에 생소한 일이라도 일단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면접까지 보았던 것인데, 정초에 이런 결과를 받아들고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열심히 했던 공부를, 오랫동안 치열하게 일했던 경력을 다 잊고 0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은 참 어려운 일이다. 20살의 나도, 40살의 나도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당장 내 앞에 놓인 하루하루의 삶에 잠시 잊었던, 그 어려운 질문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내가 보인다.

앞으로 우리는 백살을 훌쩍 넘기는 시대를 맞을 것이라 한다. 그 긴 시간동안 변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면서 동시에 내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 또 도전할 생각이다. 비록 2019년을 불합격 메일로 시작했지만, 나는 내 초컬릿 박스에 여태 꺼내 먹은 것보다 더 맛있는 초컬릿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최은영 / 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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