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초에 받는 좋은 기운

2019-01-05 (토)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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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 1일이면 우리 세 식구는 한 친지 가정을 방문해 ‘좋은 기운’을 받고 돌아온다. 그 댁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정초에 4대가 모여 차례를 지냈다. 지금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대가 되었지만, 그 댁에는 여전히 장년 세대인 4남1녀의 형제들과 그 배우자, 자녀들, 그리고 이제 그 자녀들이 결혼해 이룬 일가까지 형제, 사촌, 육촌들 수십명이 북적인다.

이 집에서 좋은 기운을 받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나와 남편, 딸 달랑 세 식구가 떡국 끓여먹고 딸의 세배를 받으면 끝인, 단출하다 못해 쓸쓸한 아침 대신 식구들로 북적이는 댁에 가서 세배도 하며 명절 기분을 낼 수 있는 이유도 있지만, 한결같이 웃음을 띠며 군식구까지 반겨주는 그 댁 안주인의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의 에너지 덕분이기도 하다.

해마다 설날이나 추석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명절 증후군’이 이 댁 안주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지, 밤을 꼬박 새워 그 많은 만두를 빚고 전을 부쳤다고 말하는 그 표정이 어떻게 매번 기쁨과 감사로 넘쳐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한 번은 우리 딸이 그러더라구요. 왜 매번 우리 집에서만 차례를 지내야 하느냐고요(사실 그녀는 제사나 차례의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막내며느리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그렇게 한다’고 했어요. 나는 남을 즐겁게 하는 일이 좋아요. 그리고 할 만하니까 하는 거예요. 건강이나 다른 여건이 따라주니까 감사하죠(그녀가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고 오해하지 마시라. 그녀는 드랍오프 세탁소를 운영하는 전형적인 이민 1세대의 주부이다).”


그 댁에 가면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는 일로 끝이 아니다. 화려한(?) 2부 순서가 기다리고 있는데, 지난해에는 안주인이 직접 만든 피냐타를 터뜨리는 게임이 등장했고 올해는 수십 개의 콩주머니를 바구니에 던지는 게임이 준비돼 있었다. 물론 상품도 있다. 휴지, 비누, 플라스틱 용기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것들이지만 상품을 타는 재미는 언제나 좋다.

“식구들이 재미없어 그냥 갈까봐 그러는 거예요. 나는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이 재미있게 더 오래 놀다 가는 게 좋거든요.”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사소한 놀이를 통해 가족 간의 추억이 쌓이고 사촌, 육촌 간의 정이 돈독해 진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으나 이 아이들이 나중에 자라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극복할 수 있는 저변의 힘이 되리라는 것을.

혹자는 이 분이 전형적인 가부장 제도에서 좋은 며느리 역할을 세뇌당한(?) 전 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면 그녀가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음을 누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인 만큼 이 일을 며느리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거나 떠넘길 생각이 없다).
또 한가지, 나는 이 댁의 드레스 코드(세배 시간에 한복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귀차니즘’의 대가인 나는 번번이 입지 않았다)를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는데, (별 일없이 내년에도 불러주신다면) 내년에는 한복을 한 번 입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명절인데 명절 분위기를 내 줘야지”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내게 문득 “너는 아직도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고 사는구나.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하는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많다. 굳이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녀처럼 가족과 이웃을 위한 마음 씀씀이가 주위 사람들에게 물결효과를 일으킨다. 삶에 대한 그녀의 감사와 열정이 내게 자극이 되듯이 나도 올해는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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