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36 )제36대 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⑩

2018-12-10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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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쟁 (계속)
1967년 5월에 McNamara 는 세계최강국이 주먹만한 미개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1주일에 민간인 1천명씩을 사상하고 있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LBJ 에게 보고하였 었다고 한
다. 그때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중 가장 격렬하게 Nazis 독일을 폭격할 때 보다도 더 많은 양의 폭격을 월남에 하고 있었었다고 한다. 1967년6월에 McNamara 는 2차대전 이후의 월남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조사연구서가 작성되도록 하였다.

연구서의 결론은 미국정부는 2차전 이후의 월남의 진상에 대해서 국민을 속여 왔다는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 McNamara 는 국방장관직을 사퇴하였다. 이 연구보고서가 그 악명높은 “Pentagon Papers” 라는 것으로써 후일 1971년에 New York Times 에 입수되어 연재되다가 국가안보와 기밀누설을 핑계로 Nixon 정부의 기소로 대법원까지 상고 되었었으나 대법원의 판결로 결국 전문이 폭로 되었으며 이 기사계재를 막아보려고 월권
을 했던 일이 Nixon 탄핵 원인중의 하나가 된다.

1967년내내 참전미군의 병력은 계속 증가되어서 47만5천명이 되었었고 사상자는 년 8만명에 달하였었다고 한다. 반전열기는 더욱 높아져서 뉴욕시에서는 30만명이 반전시위에 참가하였으며 Washington 에서는 10만명의 시위대원들이 Pentagon 국방성을 봉쇄 하였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대학교들에서도 반전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주월남 미군 총사령관 Westmoreland 대장은 1968년 1월에 또 월남전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낙관적인 보고서 (“허위?” ) 를 발표하였다. 그의 성자를 우리의 작명학적으로 풀
이해보면 “West-more-land” 로써 무장노릇을 하도록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보고서가 발표된지 나흘만인 음력설날 (Tet) 에 월공과 북월남군은 월남의 각 도시들을 미국이 Tet Offensive 라고 불렀던 총면전으로 공격하였다. 철통불락으로 생각되어 오던 Saigon 의 미국대사관의 경내까지 침공을 당했었다. 미국사람들은 TV 로 처참한 살육전을 목격하였 었다. 한달여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공산군들은 많은 전사상자들을 내고 도시들에서 철수 하였었다.

Westmoreland 장군은 공산군들이 많이 사상 되었음으로 Tet 전투는 미군과 월남군이 승전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사실은 이 전투의 결과로 공산군들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여서 미군과 월남군들은 도시들을 방위하는데 급급하였고 도시들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북쪽에서 내려온 공산군들은 활개를 치고 다니게 되었었다.

Westmoreland 장군은 추가병력 20만6천명과 공군전투기들을 요청 하였는데 이 추가 병력이 동원될 경우 기왕에 들어가고 있던 년 300억불의 전쟁비용에다가 120억불을 더 지출해야 되는 것이었다.

McNamara 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에 임명된 Clark Clifford 변호사는 LBJ 의 측근 으로써 원래는 미국이 비록 큰 희생을 감당하고서라도 월남전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매”파 인사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국방장관에 임명된후 군사보고서들을 자세히 검토해본후 월남전에 대해서 의문을 하기 시작하다가 얼마후에는 그 자신도 월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킨후 월남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Tet 피침이후 월남전이 최악의 경지로 달려가고 있을때에 1968년 대통령선거를 대비한 후보공천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 정치인” 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시인이나 철학
자 같은 인상을 주었던 Eugene Mc-Carthy 상원의원은 일부 대학생들과 반전운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LBJ 에게 민주당 대통령후보공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미국이 협상을 통한 해결을 해야하며 미군은 즉시 철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관례대로 3월 중순에 첫 공천투표가 있게되는 New Hampshire 주의 투표가 닥아 올때쯤해서는 미국민 36% 만이 LBJ 의 대통령직을 지하였으며 26% 만이 그의 월남전쟁 수행방법을 지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왔었다. 공천투표결과McCarthy 는 42% 의 득표를 하였는 데 현직대통령이 일반적으로 대게 공천되는 관례에 비해서 이 투표는 LBJ의 “패배”로 해석 되었었다고 한다.


McCarthy 의 득표에는 LBJ 의 반대표가 몰려 있었으며 월남전을 지지하던 사람들중에서도 LBJ 의 전쟁수행이 잘못되어 가고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LBJ 가 낙천될 수도 있다는 조짐이 보이자 오랫동안 LBJ 눈의 가시같은 역할을 해왔던 JFK 의 동생으로 전 법무장관이었던 Robert F. Kennedy 뉴욕주 상원의원이 3월 16일에 대통령출마를 선언하였다.

한편 Clifford 국방장관은 전에는 대개 참전주의자들이 었던 전국 각지의 중진들과 상의 해본 결과 그들 대부분도 미국이 월남전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고 생각 하더라고 LBJ 에게보고하였다. LBJ 자신이 전현직 주요 정부관리들과 직접 상의해본 결과도Clifford 의 건의와 비슷하게 나왔었다고 한다.

1968년 3월 31일에 TV 방송을 통해서 LBJ 는 미공군의 폭격을 대폭 감축하라고 명령 하였다고 하면서 평화협상을 할것을 제안하였다. 이어서 LBJ 는 방송말미에 전세계가 경악할 선언을 하였다. LBJ 는 월남에 대해서 방금 발표한 정책의 전환이 정치적인 술수가 아니 라는것을 확인해 주기 위하여“ I shall not seek and I will not accept the nomination
of my party for another term as your President!” 라고 말함으로써 대통령 재선에 출마하지 않을것을 선언한 것이다.

근대의 미국대통령들중 에서 가장 강력하게 국내의 개혁정치를 성공적으로 추진해왔던 Johnson 대통령은 그 자신의 오판으로 미국이 극심한 국제적 곤경에 빠져 들어갔음을 확인한 순간 자신의 몸을 던져 미국을 수렁텅이에서 건져낼수 있는 대정치가 다운 결단을 내렸었다고 생각된다. LBJ 의 방송선언이 있은후 3일만에 북월남은 미국의 협상제의에 동의하였다.

북월남이 미국의 협상제의에 동의한 다음날에 Tennessee 주의 Memphis에서 월남전쟁의 종식을 역설해오던 Martin Luther King 목사가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으로 암살되었다. LBJ 의 선언과 King 목사의 암살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우연히 일어났던 일들만도 아니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 전국의 흑인 들은 핵폭탄처럼 폭발하였다.

미 전역 100개의 도시들에서 흑인들이 방화하고 약탈하고 군중시위를 하였었다. 백악관에서는 절망끝에 흑인들이 Washington시내에서 흑인들 빈민가에 방화해서 치솟는 불길의 연기를 보고 매연냄새를 맡을수가 있었고 시위대의 함성을 들을수가 있었다. 얼킨 실타래같았던 월남전쟁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여지기 시작하는 듯하였으나 미국 국내의 정치적 실타래는 더욱 혼돈스럽게 얼켜가는것 같았다.

월남의 평화협상은 5월부터 Paris에서 시작되었다. 회담은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내내 계속 되었었다. 1968년 6월 23일에 이르자 미군이 월남에서 처음 전사한 1961년 12월 22일 부터 기산하면 월남전쟁은 미국역사에서 가장 장기의 전쟁이되어있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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