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해 봐’

2018-11-08 (목) Lucia Per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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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봐’

강태호 ‘숭고 812’

나의 생은 별게 아니지, 작은 얼룩보다 좀 큰,
레이더가 지나가며 만드는 작은 깜빡임보다 조금 나은,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 가터 스네이크가
바위 장미 관목을 오르고 다람쥐가 검은 딸기나무를
타고 오르듯. 지난 밤 푸른 잎은 다 진 겨울나무,
저 꼭대기를 흔들어대는 까마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담쟁이덩굴만이 매 시간 마른 가지를
감아올리는. 봐, 세상은 바빠, 세상은 빨라, 거미가 학나방의
머리에서 주스를 빨아먹을 시간을 주지 않아, 그것을
회전축으로 삼아 실을 감아올리고, 나방은 수축하여
막대처럼 가늘어질 그 시간을,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 거미줄에 걸린 우연의 비트 하나가
유리창틀에서 떨어지는, 바람 속,

Lucia Perillo ‘말해 봐’ 전문
임혜신 옮김

그 어떤 미미한 존재의 삶도 ‘작다’라는 말로 수축될 수는 없다. 시 속에서 그로테스크한 심장을 할딱이는 조그만 생명들. 우리들은 검은 딸기나무이며, 가든 스네이크이며, 거미며, 학나방이며 거미줄에 걸려 말라가다가 바람에 떨어지는 것들이 내는 아주 미미한, 미세한, 울림의 비트 한 점이기도 하다. 바람에 불려 흩어지는 소멸의 음절 하나. 그것은 당신의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이며 한 마리 나방의 그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 무엇인 것. 나무, 벌레, 짐승, 그리고 당신과 나. 무심히 빨리, 바쁘게 지나쳐도 좋은 생은 없었던 것이다. 임혜신<시인>

<Lucia Per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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