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라진 상자’

2018-11-06 (화) 신은희 (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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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상자’

송재광 ‘타임캡슐’

푸른 퍼즐 조각 이르게 떨어지는 저녁 호수
나는 간신히 여행에서 돌아왔네
시간은 검은 초콜릿처럼 사라져
아름다웠던가 기억할 수 없네
왜 사라지는 것에만 심장을 바치는지
우리는 잘못 만들어진 타자였을까
문틈으로 신비를 밀어 넣은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생의 태엽 안에 더욱 사납게 감기고 말지만
이제부터 시작될 소멸의 경험에
이번엔 슬픔으로 또 눈이 부실 것이네
꿈의 문은 닫히지 않고 영원히 나와 경주할테지
이를 수 없는 것들 별이 되고
예언을 덜어내고 사라진 상자

신은희 (1959- ) ‘사라진 상자’ 전문

저녁햇살이 푸른 퍼즐조각처럼 떨어지는 호수의 정경이 투명하다. 문제를 풀만한 단서들은 다 사라져버리고 조각들만 흐르는 미완의 세계다. 사라진, 덜어낸, 혹은 지워진 곳에 피어난 그 푸른 혼미를 우리는 신비라 부른다. 사라져버린 초콜릿처럼 아직 맛보지 못한 생의 조각들은 어디로 간 걸까? 여행, 방랑, 혹은 우울에서 돌아온 화자의 저녁 호수에 삶이라는 소멸의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조각이 많을수록 세상은 은유의 베일로 아름다운 것일까. 혹은 아닐까. 예언을 조금 던져주고 상자는 사라지고, 부서진 예언을 받아 든 물결 위에 슬픔의 별이 뜬다. 임혜신<시인>

<신은희 (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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