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오페라

2018-10-30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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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오페라가 지난 20일부터 공연하고 있는 ‘사티야그라하’(Satyagraha)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초상 3부작’의 하나다.

필립 글래스는 세상을 무력이 아닌 사상의 힘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에 관한 오페라를 창작했는데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비폭력 저항주의자 간디, 그리고 최초의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텐(아멘호텝)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온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1976년 초연됐을 때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혁명적인 작품이며 오페라의 개념을 바꾼 전위 오페라다. 스토리도 없고 주인공도 없고, 같은 음과 리듬이 반복되면서 의미 없는 단어·숫자·이미지가 5시간이나 나열되는 이 추상 오페라를 뉴욕타임스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워낙 스펙터클한 대작이라 자주 공연되지 않는 이 작품을 LA 오페라는 2013년 처음 무대에 올렸는데 그때 한인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고가 아인슈타인 역을 맡아 미니멀리즘 음악을 마치 고전음악처럼 우아하게 연주하던 광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LA오페라는 이어 2016년에 ‘아크나텐’을 공연했고, 이번에 ‘사티야그라하’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필립 글래스의 초상 3부작 모두를 무대에 올린 몇 안 되는 오페라단이 되었다. 이 3부작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에 견주어 ‘현대판 링 사이클’로 불리기도 하는데, LA 오페라가 이 두개의 거대한 연작을 모두 공연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랑스런 일이다.

‘진리의 힘’이란 뜻의 ‘사티야그라하’는 마하트마 간디가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들에게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시작한 독립운동을 그린 오페라다. 톨스토이와 타고르의 사상을 잇는 간디의 무폭력 저항운동이 시공을 넘어 마틴 루터 킹에게서 꽃을 피우면서 지금은 전 세계에 보편화된 평화시위의 시금석이 되었음을 음악과 무대를 통해 보여준다.

필립 글래스가 1976~84년 사이에 쓴 이 초상 3부작은 사실 오래전에 현대 오페라의 ‘고전’이 돼버린 작품들이다. 요즘 나오는 오페라들은 그보다 훨씬 전위적이고 실험적이며, 따라서 공연도 잘 되지 않고 일반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필립 글래스만 해도 그 이후 20여편의 오페라를 더 썼지만 그 작품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세기 들어오면서 시작된 클래식 음악과 대중 사이의 괴리는 현대음악계가 풀어야할 가장 중요한 숙제 가운데 하나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과 아리아가 있는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의 오페라에 익숙한 사람들은 비슷한 선율과 리듬이 끝없이 반복되는 미니멀리즘 음악도 듣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현대의 작곡가들은 계속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간다. 사람들의 귀는 고전시대와 낭만주의 음악에 머물러 있는데 작곡가들은 새로운 음악의 탐험을 위해 음표와 화성과 박자를 해체하고 통합하고 뒤집기를 멈추지 않는다.

현대의 수많은 작곡가들이 새로운 오페라를 끊임없이 창작하고 있지만 전세계 오페라하우스들은 매 시즌 프로그램을 ‘카르멘’과 ‘라트라비아타’, ‘피가로의 결혼’과 ‘라보엠’ 같은 18~19세기 오페라들로 채우는 이유도 바로 이 괴리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음악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이 고전과 낭만주의 음악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현대미술이 바로크나 인상주의 미술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해도 과학이 계속 발달하는 것에 비교한다면 좀 억지스러울까.

예술은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고 경험 세계를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동시대 작곡가들이 쓰는 음악을 많이 들으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듣는 귀도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아름답다고 느끼는 음악도 처음부터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축적된 감수성을 통해 경험된 것이듯, 현대음악도 마음과 귀를 열고 자꾸 들어서 친해지라는 것이 음악가들의 공통된 조언이다.

사람들이 듣지 않는 음악은 연주도 되지 않는다. 작곡가들이 아무리 좋은 곡을 써도 누군가 연주하고 누군가 듣지 않으면 악보위의 음표일 뿐 음악이 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작곡가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일부러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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