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법 앞의 무지는 죄인가

2018-10-24 (수)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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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무지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잘못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지도 때로는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워싱턴 DC에서 거주하던 선천적 복수국적 한인 2세의 ‘병역법 위반’ 사연(본보 10월20일자 A1면 보도)은 아퀴나스의 주장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과연 법 앞의 무지는 죄가 될 수 있는가 하고.

올해 스물여섯의 김씨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가진 부모님으로 인해 태어난 이후 줄곧 선천적 복수국적자로 살아왔다. 한국의 국적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는 만 18세가 되는 해 3월31일 이전에 국적이탈 신고를 하지 않아 병역의 의무가 발생했으나, 만 25세가 되는 해 1월15일 이전까지 신청 가능한 국외여행 허가를 받지 않은 채 국외에서 장기체류 해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난 2017년까지 미국에서 거주해 온 김씨는 지난 12월 휴가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인천국제공항에서 병역법 위반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병역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아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현재 ‘출국정지’된 상태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한 만 37세까지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여기서 김씨에게 죄가 있다면 한국의 국적법에 ‘무지’했다는 죄다. 국적법에 대한 무지는 한순간에 김씨를 병역법을 위반한 죄인으로 만들어 그의 청춘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는 미국에서 다니던 직장까지 잃고 한국에서 입영하는 것 이외의 대안책을 찾고 있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방안을 구하지 못했다.

김씨의 인생을 혼돈으로 몰고 간 일명 ‘홍준표 법’이라 불리는 이 국적법은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한국 국적 소유자일 경우 미국 출생자라도 만 18세가 되는 해 3월 말까지 한국 국적을 이탈하지 않으면 병역의무가 해지되는 만 37세까지 한국 국적을 보유하도록 하는’ 규정으로 지난 2005년 여론의 폭발적 지지 속에 탄생했다.

이 법은 홍준표 전 의원이 원정출산으로 인해 장래 병역기피자가 양산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졌으나, 본연의 개정 취지와는 달리 김씨와 같은 한인 2세들의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어 재외동포들 사이에서는 악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별다른 개별통지 없이 외국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들이 국적법을 사전 숙지해 개별적으로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전에 깔려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와 영사관측은 선천적 복수국적자들 중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 정보수집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선천적 복수국적자들에게 국적법과 관련한 개별통지를 하지 않고 있다. 즉, 스스로 우물을 파지 않는 이상 누구나 김씨 같은 억울한 상황에 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묻고 싶다. 법 앞의 무지는 죄인가. 무지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모르면 당하게 되는’ 한인 2세들의 억울한 피해 사례들은 자꾸만 이 질문을 되묻게 만든다.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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