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두의 관심 필요한 ‘입양인 시민권’

2018-10-10 (수) 김상목 정책사회팀장 부국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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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이 따사롭던 지난해 5월 어느 날 서울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중년 남성이 몸을 던졌다. ‘필립 클레이’란 미국 이름을 가진 42살의 김상필 씨였다.

필라델피아에 살던 김씨는 2012년 범죄전과를 이유로 강제추방 당했다. 8살 때 미국인 가정에 입양돼 29년간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살아왔지만 김씨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었다. 한국말 한 마디 하지 못했고, 생모도 생부도 찾지 못한 그에게 한국은 사막처럼 낯설고 위태로웠고, 추방은 사형선고와 같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6살 때 거리에 버려졌던 그는 8살이 되던 1983년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지만 삶은 순탄치 않았다. 첫 번째 양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클레이’란 성을 준 두 번째 양부모는 방치와 무관심으로 그를 학대했다. 불우한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그에게는 크고 작은 범죄전력이 쌓여 갔다.


하지만, 그는 성인이 되도록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었다. 그를 입양한 양부모가 당연히 했어야 할 시민권 서류절차를 해주지 않았고, 입양기관도, 미국 정부도 무관심했다. 성인이 되고서야 시민권을 취득하려 했지만, 미국 법은 시민권 취득을 허용하지 않았다. 18살이 지났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난 2000년 제정된 ‘아동 시민권 법’(CCA)은 시민권 허용 대상 입양인을 2001년 2월 27일 현재 18세 미만자로 제한해 김상필씨의 시민권 취득을 가로막았다. 8살 때 미국인 가정에 입양돼 29년을 미국인으로 살고서도 미국 시민이 되지 못한 것은 바로 이같은 맹점 때문이었다.

김상필씨와 같이 어린 시절에 미국인 가정에 입양돼 수십년을 미국인으로 살았지만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는 입양인이 3만 5,000여명에 달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절반이 넘는 1만 8,000여명이 한국 출신 입양인 이라는 점이다.

김상필씨와 같은 처지의 입양인들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수 년째 추진되고 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2015년 법안이 한 차례 발의됐지만 무산됐고, 지난 3월에는 민주, 공화 의원들이 ‘입양인시민권법안’(ACA)을 초당적으로 발의했지만 속도를 내지 못한 채 법안이 잠자고 있다.

수십년간 미국인으로 살아왔지만 미국인이 되지 못한 입양인들의 비극을 막기 위해 연방의회는 신속하게 이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주저할 이유가 없다. 트럼프 행정부도 이민정책과 관계없이 법안이 처리될 때까지 입양인들에 대한 추방절차를 중단해야 한다. 어린 시절 시민권 취득절차를 밟지 못한 것이 이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들이 미국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외교적인 노력을 다해야 한다. 떠밀다시피 이들을 내보냈던 한국 정부가 뒤늦게라도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자그마치 1만 8,000여명이다.

<김상목 정책사회팀장 부국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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