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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CD 이야기

2018-10-05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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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CD 이야기
요사이 며칠간 CD를 정리하느라 일아닌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한 4백장 정도 될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CD는 CD대로, 케이스는 케이스대로 이리저리 굴러다는 CD를 정리하자니 그것도 일이다. 그저 오며가며 구입, 대충 듣고 던져놓은 CD들이 마치 대충 살아 온 인생살이를 마주하는 것처럼 가슴 한 가운데를 어둡게 한다. 그러고보니 CD가 푸대접 받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LP와는 달리 CD는 애써 모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CD를 정리하다보면 도대체 언제 샀는지 왜 샀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CASE를 열어보면 아예 사놓고 손도 대어보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있는 것들도 상당하다. 듣지도 않을거면서 사기는 왜 샀노? 스스로에게 푸념을 늘어놓으며 CD 한 장을 플레이어에 넣고 음악을 틀어본다. 앙증맞도록 깨끗한 소리다. 나는 이 약싹빠르게 가볍고 깨끗한 소리가 싫다.

어떻게 이 손바닥처럼 작고 가벼운 CD 한 장에서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을까? CD(Compact Disc)에 밀려 그동안 내가 애써 모아온 LP(Long Play)들이 점점 필요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하다.


그것은 마치 이제 그만 자리에서 내려 오라는 것 처럼… 새 시대 새 인물에게 인수인계를 해야만하는 어느 (회사) 중역의 은퇴식을 보는 것 같은 격세지감… 나이 보다 더 주눅드는, 자신의 모습이 느껴져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왜 CD 가 싫은 걸까? 생각해 보면 CD때문에 더 아름다운 소리, 더 편리한 사용방법, 보관하기 용이한 점, 컴퓨터에 소리를 담아 버튼만 하나 누르면 수천 수만의 음악들을 자유자재로 들을 수 있는, 음악 혁명의 기틀를 놓은 획기적인 발명품인데도 말이다.

CD 가 싫은 데는 우선 CD에는 개성이 느껴져 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LP는 그래도 디스크 쟈켓에서 부터 듬직한 어떤 무게감이랄까, 비싼판은 비싼판대로 싸구려 판은 싸구려 판대로 어떤 특성이 있다. 커버 디자인에서부터 로고 그리고 배경 그림, 활자 하나하나에서부터 ‘나는 누구다’하는 그런 아이덴티티가 확하니 느껴져 온다. 판도 깨끗하면 깨끗한대로, 기스가 있으면 기스가 있는대로 들려오는 소리의 질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회사 제품이라고해서 똑같이 들려오는 것도 아니요 또 무소속 정체모를 제품이라고 해서 소리가 나쁜 것도 아니다. 케이스가 예쁘다고 해서 소리가 무조건 예쁜 것도 아니요 새 제품이라고 해서 꼭 양질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아니다. 좌우간 틀어볼 때 까지는 아무도 그 진실(?)을 알 수 없다. 같은 오케스트라 소리인데도 녹음 장소, 녹음 회사에 따라서 소리의 질이 다르다. 한마디로 LP에는 기대감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실망도 클 수 있지만 LP를 모으는 것은 단순히 상품을 사서 사재기를 하는 것과는 질이 다르다. 그 속에는 마치 인간과의 사귐과 같은 실망과 찬사… 감격과 정이 담겨져 있다.

CD에는 그런 것이 없다. 어떤 감격도 실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천편일률, 사재기와 기계적인 소리가 있을 뿐이다. 물론 CD라고해서 무조건 비난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깨끗한 소리를 녹음하고 최대한 편리한 방법으로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연주가들의 입장에선 CD만큼 획기적인 발명품도 없다. 다만 음악도 역시 사람의 정성이 한 몫하는 것이기에 그 안에 어떤 생명을 담는 문제에 있어서, 사실 녹음 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음악과의 만남을 촉진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음악을 멀리하게 만드는, 악마의 발명품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팝 음악의 경우에는 모르겠지만 CD 발명 이후 클래식 공연을 즐기는 인구가 대폭적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것이 CD 때문인지 아니면 시대적으로 클래식 인구가 점차 쇠퇴해가는 추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요사이 미국의 모든 오케스트라 중 재정난에 허덕이지 않는 악단은 없다시피하다. 특히 젊은 층에서 클래식은 급격하게 외면받고 있는 추세다.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 음악은 그만큼 삭막하고 기계적일 수 밖에 없다. 음악, 아니 다른 모든 예술이나 모임이 그렇듯 무언가 인간의 정성이 필요한 곳에는 늘 거기에 상응하는 상호 끈끈한 진액이 필요하다. 적당히 불편하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의 품을 팔아야하는 공간… 끈끈한 정을 생성하기 위하여 신이 남겨준 여백인지도 모른다.

이름하여 디지탈 시대, 인터넷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것이 편해졌고 또 옛 것의 향수가 좋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의 것으로 되돌려져야하는, 최소한의 인간성 회복없이 어쩌면 세계는 더 이상 컴퓨터 창조의 백색 가면… 음악에도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지 모르겠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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