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포스트-아메리카 시대를 재촉하는 트럼프

2018-10-01 (월)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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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아메리카 시대를 재촉하는 트럼프

파리드 자카리아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화요일 유엔 연설에서 지적이고, 때론 유창하게 “미국 제일주의”의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는 보다 광대한 국제사회의 이익보다 편협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다자협력보다 일방적 행동의 특권을 우선시하는 접근법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철수한다 해도 세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을 계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트럼프는 포스트-아메리카의 도래를 재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보자. 취임 후 그가 취한 첫 번째 주요 조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계획하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협상을 추진한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PP)에서 발을 빼는 것이었다.

TPP는 일본 등 오랫동안 닫혀있던 폐쇄시장의 빗장을 풀고, 무역문제에 있어 급속히 힘을 키워가는 중국에 맞설 그룹을 창설하려는 시도였다.

미국을 제외한 TPP의 나머지 11개국은 워싱턴이 발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협정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미국이 새로 탄생하는 시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알랑대면서도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이 아닌 유럽에 세계 최대의 경제시장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보 달더와 제임스 린제이가 곧 발간될 그들의 공저 “비어있는 권좌”(The Empty Throne)에서 지적하듯, 협상테이블에 직접 앉지 않으면 메뉴판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미국이 뒷걸음질을 치면 글로벌 아젠다는 미국의 입력(input) 없이 틀지어진다.

따라서 미국의 유엔인권위원회 탈퇴는 이스라엘에 대한 인권위의 통상적인 비난을 장외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고, 세계 도처의 독재자들에게 도덕적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워싱턴의 능력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애초부터 미국의 구상이었던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끊임없는 공격은 다른 국가들의 개입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고,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 세계 무역을 규제할 규정과 관례를 만드는 대열에 뛰어들었다.


다양한 국제기구에 대한 재정지원을 삭감하면서 트럼프는 세계무대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해온 중국을 크게 거들어주었다. 중국은 미국이 거부한 재정지원을 기꺼이 부담하면서 중요한 국제기구들 내에서 새로운 자리를 꿰차는 동시에 그에 따르는 힘과 위상을 갖추어가게 될 것이다.

미국의 핵심 외교관들의 기이하면서도 지속적인 부재는 해당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이 제대로 대변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동아시아 및 남아시아 담당 국무부 차관보의 자리가 비어있고,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등지의 대사가 임명되지 않은 상태다.

미국을 우회하려는 가장 흥미롭고 새로운 노력은 유럽에서 나왔다. 미국이 이란과의 핵무기협정을 파기하고, 테헤란은 물론 이란과 교역하는 모든 국가들에 대해 또 다시 금융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데 따른 반응이다.

국제사회에서 달러가 지니는 힘 때문에 미국의 경고를 무시한 채 이란과 상업적으로 거래하려는 주요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달러화는 국제 거래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통화다.

그러나 누구건 원하는 상대와 비즈니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유럽은 달러를 앞세운 미국의 경고에 격앙했고, 달러를 우회할 수 있는 경제적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 페데리카 모게리니는 이번 주 나와 만난 자리에서 “제아무리 가까운 유럽의 우방이나 친구라 해도 그들이 우리의 비즈니스나 교역 상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아마도 러시아와 중국 등 다른 국가들 역시 이 같은 노력에 동참할 것임을 시사했다. 유럽연합의 노력이 성공하면 미국 경제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 다시 말해 세계 경제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할 바 없는 역할에 흠집이 생기게 된다.

현실적으로 유럽의 노력이 성공할 것 같지는 않다. 달러화의 힘은 세계화된 국제시스템이 공통 통화를 필요로 함에 따라 최근 몇 년 새 더욱 커졌다.

유로화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중국 위안화는 태환조차 불가능하며 일본의 엔화는 심각한 인구감소를 겪고 있는 국가의 통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워싱턴이 스스로 자국의 힘을 축소하고, 특히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국들 사이에 미국을 우회하는 새로운 협정을 만들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시진핑이 포스트-아메리카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유럽이 이 같은 노력을 선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미국의 양위의 결과는 유럽 혹은 중국의 지배가 아니다. 장기적으로 그것은 엄청난 무질서, 글로벌한 규정과 표준의 침식이자 지구촌 어디서나 거래와 투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어든, 더욱 불가측하고 불안정한 세계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든, 평화와 번영이 축소된 세계를 의미한다. 이것이 어떻게 미국의 승리가 될까?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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