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동화

2018-09-22 (토)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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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월 가을 초입이다. 사랑하는 아들 시몬과 유진, 오늘같이 하늘이 높고 푸른 날이면 네 형제가 떠난 빈 방을 말끔히 닦는다. 네 엄마도 너희들이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도록 침구를 갈고 책장들을 구석구석 털어낸다.

솔개 같은 아들들아. 이젠 청년이 되어 세상 높이 활강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어린 너희들을 끌어안고 객지를 전전하며 힘겹게 살아온 지난 세월. 이제 시린 어깨에 찬바람 부는 나이가 되어 되돌아보니 그 길이 행복의 별이 지나간 흔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몬. 네 옛 책장에서 한국 동화집을 꺼내 든다. 주일학교 연극 준비를 하느라 밑줄 그어가며 열심히 외웠던 동화들을 들여다본다. 이곳에서 태어난 네가 혀 꼬부라진 억양으로 처음 한글로 외웠던 토끼와 거북 이야기 - 잽싸지만 게으르고 제 꾀에 넘어간 토끼와, 느린 대신 끈기 있고 착한 거북 이야기 기억하지?


네가 열살쯤 되었을까? 유난히 영특하고 매사에 열심이던 너는 다섯 살 터울의 작고 숫기 없던 동생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었다. 아빠, 빠른 토끼가 동생 같은 거북일 업고 같이 일등 하면 안돼요? 하고 진지하게 묻던 네 눈망울이 눈에 선하다. 아들들아. 아빠가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본 새로운 시각의 ‘토끼의 사랑 이야기’ 한번 들어보겠니?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한 토끼가 있었습니다. 토끼는 속으로만 사랑했기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느린 것 때문에 매사에 자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우리 달리기 해보지 않으련? 그날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그래 해보자.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거북이를 이기게 해줄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눈을 뜬 채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 자는 척 했습니다. 거북이가 가까이 오면 자기를 깨워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는 헉헉대며 옆을 지나가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하던 토끼는 눈물이 났습니다.

토끼가 원한대로 결국 거북이가 이겼습니다. 경주가 끝난 후, 거북이는 동네 동물들과 후세 사람에게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거북이가 자신감을 찾은 기쁨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아, 사랑이 무엇일까? 과시하지 않고, 양보하며 소리 없이 헌신하는 마음이겠지? 내가 저도 사랑하는 상대가 높아지면 한없이 기쁘고 흐뭇한 마음. 어려서부터 항상 동생을 세워주고 보살펴준 맏형으로서의 너의 토끼 같은 숨은 사랑이 고맙다.

그러나 이젠 동생 유진이가 너를 앞에서 끌어주는 토끼가 된 게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신참이긴 하지만 투자회사의 전문인이 되어 아직 학생 신세나 다름없는 예비의사인 형의 빚을 제 쥐꼬리 만한 봉급을 떼어 갚아주고 있다니 참 대견한 일이다.

인생길에 우리의 처지가 토끼와 거북처럼 수시로 뒤바뀌어도 함께 손잡고 결승골로 나아가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젠가는 행복의 별에 닿을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동화 속에 사랑의 비밀이 숨어있다.

<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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