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224)흑인폭동들과 백인청소년들의 반사회적 반발(상)

2018-09-14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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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취임한 Kennedy 대통령의 암살로 1963년에 대통령직을 승계한후 1964년에 자신의 대통령당선으로 Lyndon B. Johnson 대통령이 임기를 끝낸 1968년까지의 8년간 미국은 월남전으로 극심한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적으로도 미국사상 유례없이 강렬해진 흑인민권운동과 중산층 젊은이들의 반사회적 반발로 큰 사회적 혼란을 경험한다.

얼핏 보기에는 미국사회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던것 처럼 혼돈스러운것 같이도 보였었지만 좋은 측면에서 보면 마치 궤가 성장하기 위해서 낡은 껍데기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듯이 미국이 더욱 진보적이고 평등한사회가 되기 위해서 겪어내야만 했던 몸부림치는 과정이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시적인 독감쯤은 끄떡없이 겪어내는 미국의 근본적인 건장한 체질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국의 “안보”가 흔들리는것 처럼도 보였던 짧은 기간의 혼란을 되살펴 보기로 하자.

근대의 미국대통령들중 JFK 와 LBJ 는, 두 사람 중에서도 LBJ 는 더욱, 흑인의 민권향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법률과 제도의 개선을 한 대통령들이었다. 두 대통령들은 자연히 흑인들의 기대가 커지도록 격려를 하였었지만 동시에 민권향상이 기대했던것 만큼 조속하게 향상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싹트게도 만들었다. 기다리다가 지친 흑인들은 폭력적으로 항의하기에 이르른다.


남부주들에는 인종차별이 법률로써 시행되는 곳이 많았지만 노예해방을 위해서 전쟁까지했던 북부주에서도 법률대신 관행으로 인종차별을 해서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받기는 매한가지였다. 인종차별에 대한 미국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흑인들은 1964년의 뉴욕 세계박람회의 개막을 방해하는 것 같은 소극적인 방법을 쓰기도 하였으나 Rochester 와 뉴욕시에서는 폭동도 일어났었다.

1964년 여름에 Mississippi 주에서는 북쪽에서 내려온 흑백인 민권운동가들이 흑인
유권자등록을 독려 하였는데 그중 세명이 암살되었었고 많은 사람들은 구타를 당하고
부상되었다. 흑인들의 집들과 교회들이 방화되었으며 이러한 공포분위기 때문에 겨우 1,200 여명의 흑인들 만이 새유권자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그와같은 폭행들이 미국 전국에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흑인민권을 지지하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어서 그해 7월에 강력한 민권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Mississippi 에서 조차 식당 등 공공시설들이 흑인들에게도 개방되었으며 그해 가을부터 흑인과 백인 학생들을 같이 받아들이는 학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 Nobel 평화상을 받았던 King 목사는 1965년초에 남부에 3백만 유권자 등록 운동을 개시한다고 선언하고 흑인인구가 1만5,000명이지만 유권자등록을 한 사람들은 거의없는 Alabama주의 Selma 시에서 민권운동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흑인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전기충격봉으로 진압하며 체포해 갔다. 이 끔직한 장면들이 전국에 TV 로 방송되었다. King 목사는 Selma 를 출발하여 주수도인 Montgomery 시 까지 약 50
마일을 도보로 행진하는 March for Freedom 의 선두에 서겠다고 선언하고 3월 7일에
출발하였으나 경찰의 공격을 받아 출발하지 못하였고 이틀 후에 다시 시작하였으나
경찰의 공격으로 두 번째도 출발을 하지 못하였다.

George Wallace 주지사는 모든 방법으로 이 행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는 법원에 행진중지명령을 신청하였으며 Johnson 대통령에게는 Alabama 주가 행진참가자 들을 보호할 자원이 없다고 말하였다. 3월 15일에 LBJ 는 Alabama 의 주방위군을 연방군으로 편입시켜 버리고 연방의 사법관리들과FBI를 Alabama 에 급파하였다. 같은 날 그는 국회에 출석하여 생중계방송이 전국에 되고있는 가운데 Mississippi 주가 헌법상에 보장 되어있는 흑인들의 권리를 유린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흑인들의 유권자등록을 위해서 연방유권자 등록관을 파송할 수 있는 입법을 요청하였으며 Selma 의 유권자등록 운동을 미국독립전쟁을 촉발시킨 Lexington 전투와 같은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LBJ 는 민권운동자들의 열창곡이된 노래의 가사처럼 “We shall overcome” 이라고 주장하였다.

드디어 3월 21일에 King 목사의 항의행진은 연방 사법관리들, FBI 요원들, 연방군으로 소집된 주방위군의 보호아래 Selma 를 출발하였고 미국 전국에서온 목사, 신부, Rabbi 들도 동참한 가운데 행진대는 나흘만에 Montgomery 시에 평화적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에 백인여성 민권운동가 한명이 암살되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민들은 남부에서 민권을 주장하는 전 과정을 TV를 통해서
보았고 여론의 압력을 느낀 국회는 Voting Rights Act of 1965 를 입법하였으며 LBJ 는
8월 6일에 법안에 서명하였다. 이 법의 효과는 즉시 나타나서 일 년 안에 흑인유권자의
등록수가 87만명에서 50%가 증가한 129만명으로 늘어났으며 남부 각지역에서 흑인들이 선거직 공무원들로 선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흑인들의 반응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흑인들은 그때
까지의 민권향상에 만족하기 보다는 더 많은 것을 더 조속하게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Voting Rights Act 가 입법된 후 얼마를 지나지 않아서 Los Angeles 의 흑인빈민촌인 Watts 에서 1965년 8월 11일 부터16일 까지 많은 가게들을 절도하고 방화하고 백인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폭동이 일어났다. 이때 34명이 사망 하고 1,032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후 3년여 여름마다 미국 도처의 100여 도시에서 난폭한 흑인폭동들이 계속 일어났다. Watts 의 폭동은 복합적인원인들이 있었지만 그지역에서 왕성하게 상업을 해오던 한국동포들이 가장 큰 절도와 방화의 피해를 당했었다.


폭동이 타지역으로 확산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 이었던 경찰국장 휘하의 Los Angeles 경찰은 Watts 의 폭동을 고의로 전혀 진압하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었다. 일부 한인동포들간에는 한인동포들의 평소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태도들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는 자성론도 있었고 그 무렵에 뉴욕시에서도 일부지역에서 한인상가들을 흑인들이 boycott 하던 일들도 일어났다. 할렘 등 흑인집중 지역에서 가게를 하던 한인동포들은 한동안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흑인폭동들은 일부 백인들의 반흑인 정서가 더욱 강해지고 노골화 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흑인들에게 너무 많은 정부의 혜택들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일부 백인들의 반감들이 일어나 White Supremacist, Skinhead, Neo-Nazis, KKK 등이
그 전보다 기승을 부리기도 하였다.

흑인폭동들에 가장 경악한 사람은 Johnson 대통령이었다. 건설이 되어야 할 지역들이 폐허가 되고 있는것을 본 LBJ 는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들이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더 깨닫게 되었다. 흑인들의 폭동은 흑인사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그때까지는 비폭력적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King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들이 민권운동을 주도해온 셈이었는데 이무렵부터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흑인단체와 조직들의 활동이 표면화되면서 흑인사회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Elijah Muhammad 를 교주로 하는 Nation of Islam 이라는 종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Black Muslim 이라고도 불렸다. Muhammad 는 흑인극단주의자로써 인종화합을 반대하였고 백인들은 악마로 태어난 인종으로써 흑인들과 분리되어야 하며 흑인들은 흑인국가를 건국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종교의 중간지도자로써 급부상한 Malcolm X 라는 사람은 마약 등을 팔고 다니던 전과자이었지만 명연설가였다.

미국의 “소위 민주주의”의 희생자라고 자처한 Malcolm X 는 백인증오를 역설하고 다니면서 King 목사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비난하였다.<계속>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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