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레의 영산-지리산 종주기 <중>
▶ 나홀로 산길은 호젓하고, ‘선비샘’의 한모금 생수는, 심신을 청량하게 해준다
천왕봉으로 가는 등산로.
칠선봉 앞에서의 필자.
통천문.
소낙비가 줄기차다. 다행히도, 2년쯤 전에 LA에서 여성 등산동료 한분이 나의 등산장비가 부실하다면서, 마침 흔치 않은 세일을 하니 지금 빨리 달려와서 하나 사라고 강권했었다. 그 분의 성의와 서슬에, 내키지 않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던 파타고니아의 고어텍스 방수복을 그냥 배낭에 넣고만 다녔다. 처음으로 이 옷을 입게 된 오늘 여기서 비로소 이 옷이 아주 고마운 존재가 된다. 보통의 방수복은 여러 시간을 입고 있으면 몸에서 나오는 땀이 고여 그냥 비를 맞은 것이나 별반 다를게 없이 젖어지는데, 신통하게도 이 옷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휘몰아치는 빗줄기에 배낭과 내 아랫도리는 흠뻑 젖었다. 좀처럼 물이 새어들지 않는다는 LL Bean 등산화에도 이미 물이 잔뜩 들어가 철떡거리며 걷는 형국이다.
어둑한 여명에 삼도봉에 올라섰다(06:18; 1530m; 7.2km). 삼각형 금속표지물이 박혀있다. 전북 전남 경남의 경계가 되는 산이어서 이들 3개 도의 이름과 함께, 이들간에 천지인의 대화합을 기원하는 뜻깊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날이 거의 밝아졌다. 억센 비는 여전하다.
목재를 이용하여 정갈하게 축조한 계단에 이른다. 소나기를 피해 가려고 걸음을 재촉한 연하천 대피소에 드디어 다다른 것이다(08:50; 1480m; 12.2km). 고산지대이므로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연하천’이라 부른단다.
그리 넓지 않은 대피소 건물안에 들어선다. 3인의 젊고 반듯하게 잘 생긴 산사나이들이 버너를 켜놓고 라면을 끓이면서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그들이 내뿜어 놓은 구수함과 온기가 마냥 아늑하게 내 몸을 감싸준다. 그들이 내어주는 더운 물과 따뜻한 웃음으로 차가운 비와 바람에 시달린 몸이 서서히 풀린다. 소나기의 빗발이 약해진다. 오늘 안으로 산행을 마쳐야 하므로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제대로 지리산을 종주하려면 ‘화대종주’라야 한단다. ‘화엄사~대원사’구간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런 날씨에 대원사까지는 너무 먼길이 되니, 중산리로 하산하라며 격려해 준다. 내가 가는 길을 걱정하는 그들의 정이 많은 모습을, 대충은 물끼가 마른 카메라에 담는다. 나홀로 대피소를 나와 만만치 않은 빗줄기 속으로 들어선다(09:48).
다시 어제처럼 혼자가 되니 외로움이 밀려온다. 흐릿한 시야나마 그것도 기껏 20~30m에 불과하다.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을 즐기며 걷는다는 것은 아예 바랄 일이 아니다.
단촐한 단독주택을 닮은 건물이 비와 구름속에 희미하게 나타난다. 벽소령 대피소이다(11:04; 1350m; 15.8km). 벽소령이라는 이름을 순 우리말로는 ‘푸른하늘재’가 되는데, 벽소라는 이름은 ‘벽소한월’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겹겹이 쌓인 산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는 싯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여기서 10km 거리에 있는 장터목 대피소를 오후 3시 이전에 통과하지 못하면 그 곳에서 산행이 저지되는 것이 이 산의 관리규칙이란다. 그냥 통과한다.
‘선비샘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깔끔하고 아름다운 필치의 그림을 겯들인 안내판이 나온다(11:45; 18.2km). 가지런히 쌓아올린 돌 사이에 묻어놓은 파이프를 통해 맑은 물이 철철 흘러 나온다. 유래를 읽으며 마시는 한모금 지리산의 생수가 마냥 청량하다.
혼자서 가는 산길은 외롭고 호젓하다. 빗방울이 차가운 구름과 함께 몸을 적신다. 고산에 부는 세찬 바람에 주변 숲의 나무들이 온통 요동친다. 깊은 산속에 난 한줄기 좁은 길을, 앞에도 뒤에도 전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홀로 걷노라니 문득 문득 두려움이 밀려온다. 포효하는 바다에서 가차없는 풍랑에 떠밀리는 일엽편주가 따로 없다.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에 몸이 젖어드는 격으로, 몰아치는 구름바람에 얼굴이 젖어든다.
이따금씩 곰을 조심하라거나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배너들이 사납게 나풀댄다. 걸려있는 배너 중에는 ‘오늘이 마지막 산행일 수 있습니다’는 제목도 있다. 쓰러져있는 사람을 상대로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그림과 함께 ‘고산등반’의 위험을 경고한다. 비상전화번호도 적혀 있다. 서두르지 말고 무리하지 말라는 좋은 뜻이겠다. 이곳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의 고도가 1915m(6283’)인데, 사실 우리 남가주에는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봉우리들만 해도 스무개가 넘는 점을 생각하면, ‘고산등반’이라는 말이 어색하다. 산의 높이가 등산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가주에서 산을 다니며 살고있는 내 삶의 복된 점 하나를 실감한다.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을 떠 올린다. 이태님의 ‘남부군’도, 이영식님의 ‘빨치산’도 떠 오른다. 남부군이라 이름지어진 집단의 일원이 되어 갖은 신고를 겪으며 바로 이 산 이 자리에서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던 이 땅의 남녀노소 백성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적신다. 내가 밟는 이 흙속에, 나를 휘감아 도는 이 매서운 바람속에, 그들의 삭아내린 육신이, 영혼이, 통한이 깃들어 있을 것임에, 위로와 감사의 의념을 바치며 걷는다.
온통 비에 젖는 길 옆 나무의, 내 눈높이 쯤 되는, 가지 하나에 한송이 분홍꽃이 매달려 있다(12:11). 단풍이 든 잎마저 성글게 남아있는 이 늦가을의 가지들 사이에 달랑 한송이 꽃이 피어나 그야말로 함초롬이 비에 젖어 떨고 있는 것이다. 내 눈이 헛것을 보나? 신비롭기만 하다. 진달래가 아닌가 싶다. 아마도 어저께까지는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잎들마저 단풍들어 다 떨어지고 있는 이 마당에 홀로 한송이의 꽃이 피어나 있는 사정이 불가사의하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병든 어머니께 드릴 영약을 찾아 하염없이 엄동설한의 산중을 헤매이는 아들의 효심에 마침내 천지가 감응하여 -’ 라는 설정이 비단 허황한 일 만은 아니겠다고 깨닫는다.
얼핏 바람결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 내 귀가 듣는 저 소리, 과연 사람의 것인가. 왁자지껄한 한 떼거리 남녀 혼성의 산객들이다. 등을 돌리고 뒤돌아 서있는 곰같기도 하고 사람같기도 한, 가까운 바위의 주위에 서성이는 그들의 행동거지가 꽤 부산하다.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찍히고 있는 활기찬 분위기이다. 그들과의 조우가 너무나 반가운 것은 오로지 내 마음이지, 그들 일행은 어느 누구하나 내게는 한푼어치의 관심도 없다. 바위앞에 세워놓은 이정판을 보니 ‘칠선봉’이다(12:21; 1558m; 20.0km).
자그마한 바위봉들 7개가 옹기종기 고산의 능선에 한데 모여있어 마치 일곱선녀가 선경에서 노닐고 있는 듯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고 보니 잠시 비가 그쳐있다. 증명사진을 찍을 기회는 바로 이 때이다. 한 젊은 여성에게 부탁하여 한장의 내 사진을 찍는다. 이 지리산종주 전 과정을 통해 얻은 유일무이한 내 모습의 기록이다. 다시 외톨이가 되어 내 길을 간다.
문득, 화엄사에서 시작한 이 종주산행이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에 나오는 성진의 얘기와 유사치 않은가 생각된다. 망아의 경지에서 잠시 성진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퍼덕인다. 이 몸은 전라도 화엄사주지 육관대사의 상좌 성진이다. 이 산자락끝의 경상도 대원사에 있는 남악 위부인에게 스승의 선물을 전하러 가는 길인데, 여기서 뜻하지 않게 위부인 휘하의, 8선녀 아닌, 7선녀를 만난 것이다. 이 부근에 있다는 일곱 바위선녀들이 아니더라도 미상불 조금전에 조우했던 산객들이 칠팔명쯤 됐던 것 같다. 물론 남녀 혼성이긴 했었다. 대원사는 마침 비구니 사찰이라고 하니 얘기가 그럴듯 하다. 내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던 한 마디 말은 성진이 선녀들에게 길을 비켜 달라며 말을 건넨 모양새에 부합되는 일이겠다.
부질없이, 외로운 그러나 설레는 상상을 하며 걷다보니 제법 큰 규모의 붉은 색 건물이 구름속에 희미하게 자태를 나타낸다. 세석 대피소이다(13:01; 1560m; 22.1km). 큰 건물은 숙소인 듯 한데, 그 옆에 화강암 돌들을 쌓아 만든 아담한 취사장 건물이 있다. 안으로 들어간다. 의외에도 10여명 산객들로 활기에 차 있다. 비 바람으로 날씨가 궂으니 다들 마냥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 배낭을 연다. 젖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비닐에 싸둔 화장지가 종이죽이 다. 궁즉통, 혼자인 듯한 옆의 남성에게서 따뜻한 물 한잔과 화장지 몇장을 얻는다. 대충 신변을 정리하고 대피소를 나선다(13:29).
길이 많이 넓어지면서 바닥에 큰 돌들이 고르게 깔려있고, 넓직한 돌계단도 보인다. 양쪽 길변으로는 철봉 가드레일이 설치되어있다. ‘촛대봉’이라는 팻말이 있다(13:48; 1704m). 여기저기 바위들이 희미할 뿐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다. 무엇인가 죄를 지은 한 여인이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을 향해 신령께 빌었지만 용서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모습의 돌이 있다고 한다. 짙은 운무로 그러한 정경을 볼 수 없다. 가녀린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길래, 그런 벌을 받았을까. 안쓰럽다. ‘천지불인이만물위추구’ - 이 여인에게 하늘은 역시 ‘불인’하셨나 보다.
‘연하봉’임을 알리는 이정표에 이르렀다(14:41; 1721m; 24.7km). 장터목 대피소까지의 거리는 0.8 km가 남았고, 통과제한시각인 3시 까지는 19분이 남았다. 약간은 불안하다. 자잘한 기암괴석의 변화감이 큰 바위봉들이 길옆으로 희미하게 많이 나타나곤 한다.
바위들이 날카롭고 경사가 진 곳에 신기루인듯 희미하게 ‘장터목대피소’가 윤곽을 드러낸다 (14:54; 1653m; 25.5km). 통금시각 6분을 남겨 놓고 이곳을 통과한다. 장터목이란, 예전에는 천왕봉 남쪽 기슭의 경남 산청군 시천면의 주민들과 북쪽 기슭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에 장을 열어 서로 필요한 물품들을 교환하던 곳이라서 불리던 이름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두 지역이 다 한적한 지리산의 기슭이었음을 고려할 때, 주민들 상호간의 교역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이 깊은 심산에서 주민들에 의해 채집 또는 포획된 산물들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보부상이나 떠돌이 장꾼들을 통하여 모아지는, 이곳 토산품의 1차적 집산시장의 성격을 더 많이 띄고 있었을 것이다.
장터목 대피소를 지나니 조급함이 누그러진다. 길은 이제 차츰 가파르고 옹색해 진다. 예사롭지 않게 멋진 크고 작은 바위들이 길 옆으로 불쑥불쑥 나타난다. 등산로의 어느 한쪽은 깊거나 얕은 벼랑의 형태를 띄어간다. 철제 가드레일이 설치된 구간도 잦아진다. 바닥은 이제 거의 거친 돌들이다. 높고 뾰쪽할 천왕봉이 가까와지는데서 나타나는 정상부위의 지리적 특징이겠다.
천지가 조판될 무렵의 혼돈기에 이 위에 솟아나 있던 거대한 바위봉이 그 옛날 언젠가 깨어져 무너져 내리면서 생겼을 바위들 틈새로 길이 이어져있다. 이름하여 ‘통천문’이다(15:27; 26.7 km). 정상까지 0.5 km가 남았다는 안내판이 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 천왕봉에 올라가는 문, 속계를 떠나 선계로 오르는 문, 중생고를 벗고 천상락으로 이르는 문이 여기에 있다. 예전에는 죄있는 사람은 결코 지나 갈 수 없는 장소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큰 바위들 사이에 형성된 긴 공동을 지금 막 지났으니 이제 내 몸은 의당 하늘세계에 놓여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의 암봉들의 분위기도 범상치 않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아슴한 운무들은 하늘나라의 상서로운 기운이고 신비로운 경계이다. ‘별유천지 비인간’이 바로 이곳의 형용이겠다.
‘통천문’을 지나자 곧바로 가파르게 곧추선 철제 계단이 코 앞에 나타난다.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두레박이고 동아줄인가 보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 사이로 설치된 계단을 다 오르니 좁은 평지에 내리게 되는데, 저만큼에 다시 철계단이 있다. 스무계단 쯤이 된다. 이를 오르니 굵은 돌을 깔아 만든 길이 나오고 다시 철계단이 나온다. 구름은 계속 두텁게 주변경관을 감추고 바람은 더욱 세차다. 포말된 물끼를 온 얼굴에 뿌려댄다. 죄많은 나를 꾸짖어 물리치려는 정황이다.
이제는 다 왔나 싶은데 그게 아니다. 거칠기만한 암봉들 사이로 오른쪽에 또 왼쪽에 나무로 만든 가드레일들이 번갈아 나타남으로써 길을 인도한다. 날카로운 바위틈에 낸 길을 따라 내리고 또 오른다. 시야가 짧음이 거듭 아쉽다. 그러나 희끄므레하고 어렴풋한 형상들이라 더욱 신비롭게 보일 터이니, 어쩌면 행운일 수도 있겠다. 오른쪽에 큰 안내판의 형체가 눈에 들어온다(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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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