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늦게 찾아온 길동무

2018-09-11 (화) 윤영순 /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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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 방문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광화문 네거리의 교보문고였다. 이곳은 젊은 날 남편이 쓴 교재들이 몇 부나 전시되어 있나 찾아보기 위해 그를 따라 몇 번 가 본 기억이 난다. 늦은 나이에 오롯이 나를 위한 책을 사기 위해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전시장 안에는 문학 책 만해도 수없이 많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취사선택을 위해 잠시 읽어 볼 수 있도록 배려한 의자에 앉아 문학책 중에서 수필집 몇 권을 골랐다. 그 동안 미국생활하면서 외면했던 책들을 몇 권 구입해 가방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태평양을 건너 집으로 돌아와 글 읽고 쓰는 재미에 빠져있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취미생활로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가 따라야 한다. 결혼을 하고 한동안 가계부를 적기 시작한 후 그날그날의 일들을 일기로도 적어 보았다. 일기는 내 마음의 친구가 되어 움츠린 속을 후련하게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곱씹게 되는 아픔을 되새기게도 하며 서랍 속에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내가 다니는 시니어 아카데미에 마침내 문학창작반이 개설돼 강의를 즐겨 듣고 있다. 예견된 노년이 찾아오고 주체할 수 없는 많은 시간이 밀어 닥칠 즈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는 모처럼 나를 두렵고 떨리게 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 속에서 알게 된 삶이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어린 아이가 첫 걸음을 내딛듯이 조심스레 내 일상의 나날을 이야기로 적어본다. 오늘도 천천히 글감이 떠오르면 쓰다 지우기를 반복해 주위가 온통 지우개 자국으로 지저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아-가라 (Nia-gara)”를 흥얼거리며 오늘도 섬광처럼 생각이 떠오르면 곁에 둔 메모지에 글들을 옮겨본다. 늦게 찾아온 길동무가 내 삶을 풍요 속으로 초대하는 것만 같다.

<윤영순 /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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