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을 맞으며

2018-09-08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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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노란 꽃이 피었습니다, 물결처럼 하늘하늘 일렁입니다.’

한 세대 전 우리 청춘의 감수성을 자극하던 굵직한 저음의 가수, 홍 민의 아름다운 노래 ‘수선화’를 나지막이 따라 불러본다. 온 세상이 잠든 듯 고요한 노동절의 이른 아침이다.

나는 구름 낀 샌프란시스코 베이 트레일을 걷다 인적 드문 해변 수풀 길로 내려가 본다. 재두루미, 흰두루미, 펠리컨, 물오리, 기러기 등 수백 마리의 물새들이 평화롭게 물속을 헤집으며 아침식사를 즐기는 장관이 펼쳐진다. 바다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고기와 수서생물들이 있길래 이 많은 물새들이 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해양 생태계의 조화로운 먹이사슬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연중 대표적 공휴일이라 피트니스 센터도, 코스코도 그리고 웬만한 비즈니스도 거의 문을 닫아 온 세상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정말 어디론가 가지 않으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물가가 만만치 않은 곳이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그만한 매력이 있는 도시이다. 꾸불꾸불 롬바르드 꽃길 언덕, 이 언덕 저 언덕을 오르내리며 우리를 천국까지도 데려다 줄 것만 같은 케이블카, 구름 걸린 금문교 교각을 휘돌아 부두로 돌아가는 유람선.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서늘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1938년까지 수감되었고, 1962년 6월엔 세명의 죄수가 매일 배급된 빵을 다져 인형을 만들어 놓고는 몇 달의 밤샘작업으로 벽을 헐고 탈출해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는 알카트라즈 섬의 연방교도소 유적지 등 수많은 명소가 있는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이곳은 해변을 달리는 사람들 외에는 이제 민소매 차림으로 다니는 이들을 보기가 어렵다. 주차료 비싼 피셔맨즈 워프 구역에서 5분쯤 대기하다 운 좋게도 무료 주차공간에서 빠져나가는 차를 발견하고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초컬릿으로 유명한 기라델리 스퀘어에 가서 초컬릿을 사고, 관광객들의 인파에 이리저리 휩쓸려 본다.

그리고는 호젓한 스타벅스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방전된 스맛폰엔 전기를, 하루 종일 커피를 못 마신 내 영혼엔 구수한 커피향의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충전해 준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백팩을 뒤져 얼마 전 구입한 ‘힐빌리 엘레지’를 꺼내 읽기 시작한다. 계속 백팩에 넣어둔 채 지고만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까.

실리콘밸리의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예일 법대 출신 34세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얼마 전 미주 한국일보에 소개된 적이 있어 구입했다. 이립을 겨우 지난 나이로, 유명 정치인도 아니고 주류 앵글로색슨 백인 개신교도(WASP)도 아니면서 감히 자서전을 내는 것은 겸연쩍은 일이라며 겸손해 하는 서문에 나는 이내 마음을 빼앗긴다.

18세기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켈트족 이민자들은 켄터키, 오하이오 그리고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 산골에 정착해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외부 사람들은 이들 산골 사람들을 힐빌리 즉 산골 무지랭이, 백인 노동계층, 레드넥 또는 와잇 트래시 등으로 비하해 부르는데, 이들은 마약과 대물림되는 가난에 찌들어 히스패닉 이민자들이나 흑인들보다도 훨씬 더 비관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자가 그 가난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나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벤처 캐피탈리스트로 화려한 비상을 하게 되었는지 그 진솔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자못 기대가 된다.

요즈음은 페이스북 같은 SNS에 중독돼 틈만 나면 포스팅을 올리고 읽거나 댓글달기를 하느라 차분히 책장을 넘기는 진지한 시간을 가져본 지가 언젠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정도이다.

노동절을 기해 여름은 가고 결실의 계절 가을로 들어섰다. 가을엔 이 책의 저자가 부단한 노력으로 힐빌리의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 날아오른 것처럼, 나도 말초적인 SNS에서 벗어나 독서와 사색으로 내 영혼을 살찌우고 싶다.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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