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부싸움

2018-09-07 (금)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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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인간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꺼린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의 매듭을 풀어야하는 정신과의사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정신과의사로 알까봐 더 몸을 사린다. 혹시나 불이익을 당해 생존을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진화심리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그 배경이다.

얼마 전 단체여행 중 나의 정체가 밝혀지자 곧바로 어느 여행객으로부터 질문이 날아 왔다. ‘부부싸움 후 반드시 화를 풀어야 하는 건지 그냥 가슴 속에 넣고 있는 게 좋은 건지’ 하는 질문이었다. 대답을 안 하면 오만하다고 생각할까봐 서로의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의견을 나누는 게 정신건강에 유익할거라고 정신과의사 아니더라도 알만한 말을 했다.

부부싸움은 삶의 한 얼굴이다, 대통령, 목사, 철학자, 의사 내외도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은퇴한 황혼부부의 경우는 더 그렇다. 얼마 남지 않은 세상 웃고 살자고, 미움, 원망, 기대, 불평 다 내려놓고 항상 감사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처음이고 또 끝일지도 모르는 오늘을 의미 있게 살자고 다짐하고 다짐하건만 싸움 없이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또 싸우게 되는 것이 인생살이다.


인류역사를 돌아봐도 2 사람 이상의 집단체제에서는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었다. 서로의 겉과 속이 다르고, 주어진 상황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은퇴한 내 친구의 이야기다. 저녁나절에 사소한 일로 아내를 화나게 만든 언행의 여파로 저녁도 못 얻어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아내의 얼굴을 힐끗 보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싶어 부랴부랴 아침을 챙겨 먹고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그날따라 도서관은 문을 열지 않았다. 직원훈련 날이라는 쪽지가 문 앞에 걸려있었다. 마땅히 시간 보낼 곳이 없어 도서관 근처 맥도널드로 갔다.

그와 비슷한 나이거나 더 들어 보이는 남자 노인들이 군데군데 앉아서 아침을 먹거나 커피 한잔 시켜 놓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두 쌍의 노인부부 말고는 모두 혼자라 홀아비들이거나 아니면 그 자신처럼 성난 마누라를 피해 나온 영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은 책임지고 챙기지만 그 외 일은 대충하는 준비성 부족한 비체계적인 유형이다. 무엇이든 닥치면 다 되기 마련이라는 느긋한 삶의 방식이다. 반면 그의 아내는 무슨 일이든 항상 계획하고 준비하고 확인해야 마음이 편한 체계적 유형이다. 아내는 그를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불평하고 친구는 아무리 계획하고 준비해도 잘 안 되는 세상에 아내가 왜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사는가를 이해 못한다.

한편 싸우지 않고 사는 부부는 바보이거나 서로에게 무관심한 커플이다. 물론 관심을 너무 가져도 싸움이 잦아진다. 싸움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가볍게 다투는 일은 삶의 자극제요 양념이 되기도 한다.

혼자된 환자들에게 배우자와 같이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을 물으면 상당수가 부부싸움이라고 대답한다. 문제는 싸우는 당사자들의 성격이다. 강박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는 싸운 것을 너무 심각하게 여겨 장시간 싸움의 내용을 반추하는 경향이 있다. 그 반대쪽은 언제 싸웠느냐는 식으로 금방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특히 은퇴 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의 숨겨진 다른 면들이 나타나 서로를 배려하기가 힘들어 진다.

부부싸움에 대한 상담은 너무 어렵다. 각자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라가는 원론적 조언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대부분의 부부싸움이 서운하거나 화나게 하는 말로부터 시작되므로 먼저 대화하는 요령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 “여보, 이렇게 하자.” 보다 “이렇게 하면 어때?” 하는 식이다. 자신이 백번 맞다 해도 이런 식의 대화는 대단히 생산적이다.

아울러 말에 부정적 감정들을 섞어 내뱉는 것은 비효과적이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노름 중독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등 큰 잘못을 제외한 일상의 잘못들에 대해 “또 그랬어?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그랬잖아? 정말 못살아, 못살겠네.” 대신 “여보, 예전에도 그래서 피해를 봤잖아.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조금만 더 생각할 수 없을까?”가 바람직하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미완성의 존재라서 실제로 이렇게 대화하기는 매우 힘들다. 진화적으로도 감정의 뇌가 이성의 뇌보다 훨씬 일찍 발달되었고 또 외부와 내부로 부터 받은 자극들은 먼저 변연계 영역을 거쳐 대뇌 피질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 등 일상에서 부딪치는 여러 상황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잘 관찰해보기를 권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짜 자신의 핵심이 그 속에 있지 않을까 싶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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