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돌아온 꽃

2018-09-01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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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다. 같은 곡을 종일 되풀이하여 들어도 물리지 않는, 대학시절 나의 영혼을 쥐고 흔들던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토론토에 왔다. 젊다 못해 여리던 내 젊음을 들고, 아니 우리의 젊음을 들고서.

눈물이 마를 나이에는 환상이라도 품어야 삶이 잠시 반짝인다. 그의 숨결을 느끼며 노래를 들으면 빛바랜 추억에도 생기가 돌지 모른다는 기대가 꿈인 듯 멀리 있을 때, 콘서트 티켓을 손에 쥐었다. 정말 내가 가도 될까.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없던 옛사랑을 만났을 때처럼 돌아서는 발걸음이 허허롭지는 않을까. 기다리는 내 마음은 공연을 준비하는 가수만큼이나 긴장되고 설렜다.

시큰둥한 남편을 설득해 콘서트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도착한 우리는, 시내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며 모처럼 기분을 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관객의 대부분은 초로의 아줌마들이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린 구부정한 남편들은 내 남편처럼 마지못해 따라온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무대에 섰다. 어둠을 지우며 무대에 불이 들어왔고 비명에 가까운 아우성과 휘파람 소리가 이어졌다. 가만 앉아있어도 심장 울림이 커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잠결에도 들리던, ‘광화문 연가’와 ‘옛사랑’ 노래를 그가 부를 터였다. 가사와 선율을 타고 다가오는 젊은 한때의 애틋하던 기억들이 어디에선가 비눗방울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이문세, 그와 함께라면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갈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멀리서 내려다볼 때는 흐릿하던 그의 얼굴을, 대형화면이 확대하여 보여주었다. 지나친 친절이었다. 몽환적인 시간을 기대한 나는 화면 가득한 적나라한 주름과 초췌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더는 젊지 않은 나이에 멀리 오느라 피곤했을까, 아프다더니 그래서 그럴까. 다 그만두고 편히 쉬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부르는 노래를 기다리는 모순 속에 시간은 마냥 더디게 지났다.

그때 조명이 밝아졌다. 어디서 갑자기 그런 힘이 났는지, 그가 마이크를 휘어잡더니 모두 일어서서 즐길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일어서서 즐길 준비라니. 기다렸다는 듯이 네에~ 와아~ 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고? 반사적으로 나는 옆자리에 앉은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별 소릴 다 듣는다는 표정이었고 주위에서는 다들 일어나느라 부산스러웠다.

앉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부부와 아내를 따라온 할아버지 같은 남편 몇이 눈에 띌 뿐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일어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껑충껑충 뛰는데 멀뚱하니 앉아 있자니 민망했다. 일어나야겠지? 간절한 눈빛으로 묻는 내게 남편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옆에도 뒤에도 살집이 넉넉해진 아줌마들이 좁은 통로에 낀 채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단어 그대로 무아지경이었다. 이문세의 에너지는 저 혼자 끓다 사그라지는 열정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관객을 일어서게 만들고 같이 뛰며 열광하게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그의 음악과 춤은 나의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내 몸과 영혼을 흔들었다. 이제 일어설 때가 된 것 같았다.

나마저 일어서면 남편 혼자 외딴섬처럼 남겨질 게 뻔한데, 그 사람만 고립시킬 수는 없는 일. 버틸 만큼 버티다가 결국 내가 일어섰다. 홀로 앉은 외딴섬을 육지로 편입시키려고 나는 정말 재미있는 척 뛰었다.

남편의 눈길이 내 몸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나도 그만 앉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남들은 신들린 듯 뛰는데 접신도 못한 채 부부섬으로 남겨질 우리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가 좋아하는 조용한 노래가 나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고통은 길고 기쁨은 순간인 듯 느껴지는 삶이 그곳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란의 시간은 길고 달콤한 시간은 찰나에 지나갔다.

한데 어우러져 소리 지르고 춤추는 동질감이 갇혀 있던 영혼을 자유롭게 불러냈나 보았다. 중년이라는 나이의 갑옷을 벗어 던진 아줌마들은 돌아온 꽃 같아 보였다. 엄마도 아내도 주부도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활짝 피어난 열정의 꽃. 스물의 나이로 돌아간 듯 발그레 상기된 얼굴에 핀 꽃은 눈부셨다.

기대했던 애잔한 분위기에 젖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나는 운전하는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육지가 되고 싶지 않던 홀로섬에도 꽃은 피었던가. 여태껏 내 몸과 마음을 기대어 쉬게 해준 나의 섬에서 ‘옛사랑’ 노래가 휘파람 되어 나지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두듯이’.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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