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기에서 감지되는 인종주의

2018-08-18 (토)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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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사소한 에피소드 한 토막.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산책 중에 마주 오는 이가 있어 “하이”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못들은 척 하고 그냥 지나가더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단다. 진짜로 못 들었을 수도 있고 그냥 별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전과 달리 “저 사람이 내가 아시안이라고 저러나?”하는 생각이 들어 몹시 불쾌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아주 오래 동안 소식이 궁금했던 사람을 만났다. 반가운 김에 이런저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는데 느닷없이 저 쪽에서 “탁”하는 소리가 났다. 어떤 사람이 마치 심통이 난 듯 자신의 물통을 식수대 위에 세게 내려놓는 소리였다.

분명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는 위치는 아니었는데, 혹시나 “한국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이 들면서 기분이 찜찜했다. 쫓아가서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냥 지나친 과잉반응이려니 하면서 넘어갔지만 사실 공기에 감지되는 느낌이 전과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에 30년을 살아오면서 한국에 나갈 때마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호기심어린 질문을 받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물론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는 공고하고, 대다수 양식 있는 시민들은 이 사회적 합의를 충실히 따른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차별이 없는가? 같은 민족끼리도 빈부에 따라, 학력에 따라, 심지어 출신지에 따라 차별을 하지 않는가? 어디서든 썩은 사과는 있게 마련”이라고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그다지 피부로 못 느끼고 살았었다. 중산층이 거주하는 교외지역의 이웃들은 언제나 친절했고, 글로벌 마케팅에 목숨을 거는 직장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었다. 더러 기분 나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썩은 사과”였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한데 요즘 들어 “과연 그런가?” 하는 회의가 문득문득 들곤 한다. 1965년 연방의회가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지 불과 반세기도 안 돼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미국이지만, 결국은 그에 대한 반동이 트럼프의 집권을 가져왔다. 그가 말끝마다 부르짖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아메리카는 어떤 모습인 걸까.

지난 12일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집회로 3명이 희생된 버지니아 샬로츠빌 사태 1주기였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흥미 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샬로츠빌 사태 직후 워싱터포스트가 저명 사회/심리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21세기 미국의 백주대로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를 분석한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 이른바 “일상의 인종주의(everyday racism)”를 20년 넘게 연구해 온 뉴욕대학교 심리학과 에릭 놀즈 교수는 “인간에게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본래의 멘탈리티”라면서 “기본적으로 미국인들이 가진 편견의 기저에는 변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인종주의자에게 이틀이 지나도록 분명한 시그널을 보내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악랄한 형태의 인종차별의 고삐가 풀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같은 기사에서 예일대학교 사회심리학과 제니퍼 리치슨 교수는 “자녀들에게 인종주의자가 되면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부모가 아니라면, 자녀를 인종주의자로 키우고 있는 것”이라 들려준다. 그녀는 “학생이 학교에 가면 누가 ‘쿨’하고, 누가 아닌지를 다른 사람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처럼, 인종주의자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악마가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금세 주변 공기에서 감지하고 습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차별과 편견이 자리하고 있고, 적극적인 교육에 의해 내재화되지 않으면 누구나 인종주의자가 되기 쉽다는 것, 지금 그러한 징후가 도처에서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미국사회의 건강한 가치를 믿고 스스로를 “건전한 미국 시민”으로 믿고 살아온 내게도 요즘 들어 부쩍 예민한 반응이 일어난다.

역사의 진보란 멀리서 보면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보 전진과 이보 후퇴를 반복하며 피로감과 좌절감을 안겨주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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