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220) 제35대 John F. Kennedy 대통령⑫

2018-08-17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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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운동씨앗을 뿌린 JFK (계속)
1963년에 들어서면서 학교, 대학교, 호텔, 식당, 취업, 그외의 일반생활 전체에서 인종차별이 없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전보다 더욱 또렷하고 우렁차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남부도시 300여곳에서는 “Sit-in”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흑인불허장소에 주저앉아 꿈적도 하지않는 방법) 과 항의시위들로 식당, 호텔, 기타의 공공장소의 인종차별이 금지되도록 만들었다. 공공장소에서 점차적으로 “백인전용,” “흑인전용” 이란 표말들이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 4월에 Martin Luther King Jr. 목사와 그의 SCLC(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는 Alabama주의 Birmingham시에서 인종차별 중단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는 시의 법률로 인종차별이 시행되고 있었다. King목사와 시위참여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하였으나 경찰국장의 지휘아래 경찰은 축우몰이용 전기충격봉, 맹견, 소방호스를 사용하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Birmingham은 폭동과 폭파의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끔직한 장면들이 전국으로 생중계 방송되었다.


같은해 6월에 Alabama주의 민주당 극우 보수적 George Wallace 주지사는 흑인학생 두명이 University of Alabama 에 입학하려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Alabama 주에서는 인종차별이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라는 악명높은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JFK 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한 Wallace 는 결국 두 흑인학생들의 입학을 허락할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인종차별을 없애고 흑인들이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연방법들이 제정될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해 졌었다. 1963년 6월 11일에 JFK 는 TV 연설에서 “우리는 전세계를 향하여, 아니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나라는 흑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 땅’ 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까? 우리는 흑인을 제외하면 2등시민이 없는 나라라고 자랑할 것입니까? 흑인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는 사회계급, 반상제도, 빈민굴이나 우수민족이 없는 나라라고 자랑할것 입니까?” 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날밤에 Mississippi 주의 NAACP 지부장이었던 Medgar Evers 는 그의 집앞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후일 1970년에 City University of New York 소속으로 Medgar Evers College 가 Brooklyn 에 세워졌다.

그 일주일후에 JFK 는 새 민권법안을 국회에 보냈다. 이 민권법안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는 수준에는 미달하였지만 그때까지 제안되었던 모든 입법안들 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새 민권법안을 국회가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서 민권운동가들은 미국사상 가장 큰 궐기대회를 하기로 하였다. JFK 는 법안반대 의원들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악영향을 고려해서 궐기대회를 만류하고자 하였는데 그때의 열기를 막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었다. 드디어1963년 8월 28일에 20만명이 모인 초대규모의 궐기대회가 노예해방 선언을 했던Abraham Lincoln 대통령 기념관 앞에서 열렸다.

흑인, 백인, 모든 인종들인 Freedom Marchers 들이었다. King 목사는 그의 역사적인 16분간의 명연설 “I have a dream” 이라는 짤막한 연설로 모든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세계적인 명 흑인 소프라노 Mahalia Jackson 의 선창으로 20만 참석자들은 침례교 성가인 “We shall overcome!” 를 합창하였다. 그때에 이 성가는 이미 “민권운동가” 로 널리 불려지어 오고 있었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날의 합창이 방방곡곡에 들려질수가 없는 넓은 땅덩어리 이고 그날의 열기가 녹여 버리기에는 인종차별의 편견의 뿌리는 너무 깊은곳에 묻혀 있었다.


그해 9월에 King 목사의 꿈이 이루워지기에는 아직도 수많은 험로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참사가 또 일어났다. Birmingham 흑인교회에서 폭탄이 폭발하여 나이어린 흑인소녀 네명이 살해되었다.

주로 쏘련과의 대립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국제문제를 처리하고 국내경제의 활성화와 동시에 사회복지향상, 민권확대 등등을 위한 New Frontier 입법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쉴틈이 없었던 JFK 는 1964년 11월의 대통령선거에 재출마할 준비도 1963년 부터는 서서히 시작하여야 했었다.

그는 재선을 위해서 Florida 와 Texas에서 승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11월에 두 주를 방문하기로 하였는데 Texas에서는 그주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Dallas를 세시간여 방문하면서 연설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Texas 주 출신 Johnson 상원의원이 JFK 에게 밀려서 부통령이 된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JFK 가 Texas 에서 인기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또 돌고 있었다고 한다. JFK 가 방문하기 몇달전에 UN Day 에 연설차 Dallas 를 방문했던 JFK 측근으로 알려졌던 Adlai Stevenson 주 UN 대사에게 청중들이 침을 뱉고 몸을 떼밀며 야유를 해댄 소동이 있을 정도로 반 Kennedy 정서가 있었다고도 한다.

“네번째로 재임중 암살된 John F. Kennedy 대통령”
11월 22일의 JFK 부부의 방문에는 Johnson 부통령 부부와 John B. Connally Texas 주지사 부부도 동행하였었다. 가두에 몰려나온 시민들의 열열한 환호에 Connally 부부와 함께 무개차의 뒷좌석에 앉은 JFK 부부는 답례하며 서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몇발의 총성이 났었는데 총알들이 JFK 의 목과 두뇌를 관통하였다. 같은 차에 탔던 Connally 주지사도 손에 총상을 입었다. 무개차가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JFK 는 이미 절명 했었으며 젊은 대통령의 원대한 꿈은 시작된지 1,000 일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Lincoln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100년동안에 세명의 대통령이 더 암살된 것이다.

Lee Harvey Oswald라는 다소 정신이 나간 것 같아 보이는 외톨백이가 암살혐의자로 곧 체포되었는데 그는 쏘련에 가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쏘련부인 Maria 와 살고 있는 사람 이었다. 이틀후 생중계 방송중에 경찰의 호송으로 Oswald 는 구치소를 옮겨가고 있던중에 한 night club 의 주인인 Jack Ruby 라는 사람의 총격을 받고 즉사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미국에서 있을수 있는 일인가? 암살의 배후에 쏘련이 있다, Cuba 가 있다, CIA 가 있다는 풍설이 즉시 돌기 시작하였으며 Johnson 부통령을 의심한다는 얘기까지 나돌았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진상은 오늘날 까지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낭설에 낭설만 꼬리를 있는 미궁속에 묻혀있다.

Johnson 대통령은 Earl Warren 대법원장을 진상조사 위원장에 임명하고 암살사건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Warren 은 그때 까지의 미국 대법원장중 가장 진보적인 대법원장이 었던 사람으로써 미국민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California 주지사를 지낸 보수적인 공화당 정치인으로써 한때 대통령후보로 까지 거론되었던 사람 인데 그의 보수성을 존중한 Eisenhower 대통령이 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했었었다. 대법원장 취임이후 차츰 성분이 “완숙”해지면서 180도를 돌아서 진보적인 대법원장이 된 사람이었었다. Johnson 대통령은 Warren 의 판단에 대해서 공화, 민주,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불신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갹해서 Warren 을 조사위원장에 임명했었다고 한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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