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부머리, 업무머리, 살림머리

2018-08-11 (토) 실비아 김 현대오토에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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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이 폭염으로 허덕이고 있다 보니, 최근 한국에 다녀 온 동료의 여행 이야기도 숨 막히게 더운 날씨가 주 내용이었다. 백화점에 갔는데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켠 상태로 장시간 주차하고 있는 운전자들이 많고, 거기서 나오는 매연으로 밀폐된 지하 주차장 공기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며, 자기 몸 시원하자고 공회전하고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에 화가 나더라고 했다.

“그 운전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지하지 못했을 거야. 더우니 에어컨을 켜놔야겠다.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다음 단계로 사고가 안 되는 사람들이 많잖아’ 라고 했더니 동료는 ”맞아.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 있어“라며 누군가가 떠오른 듯 웃었다.

SNS에 사진이나 글을 올렸다가 구설수에 오르고 대중에게 엄청난 질타를 받는 공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를 하면 전에는 ‘몰랐다니 말도 안 돼. 여론이 안 좋으니 발뺌 하는군’ 했지만 요즘은 ‘이런 여파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는 변명이 믿어지기도 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고 그 능력이 단기간에 쉽게 개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들어 절실히 깨닫고 있다.


대학시절 나는 중고교생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주로 영어나 수학을 가르쳤는데, 공부 머리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영어의 논리나 수학 연산의 사고를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그럴 때 ‘왜 이 쉬운 것도 못 알아듣는 거냐?’고 다그치는 대신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같은 설명을 여러 번 해주니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계속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공부 머리라는 것이 따로 있듯, 업무 머리라는 것도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명문대를 졸업했어도, 박사학위가 있어도, 경력이 길어도, 어떤 업무 요청을 받았을 때 그 배경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그 업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요청 받은 것만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한국에서는 업무 머리가 좋지 않은 후배들도 가르치고 이끌면서 팀 역량이 늘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공부 머리가 없어도 끝없는 노력으로 성적을 올렸던 학생들이 간혹 있었던 것처럼 후배들 몇 명은 나의 끝없는 (충고라는 명목 하에 내뱉는) 잔소리도 귀담아 듣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업무 능력을 향상 시키곤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하면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 같은 선후배 관계라는 것이 없는데다, 업무평가에서 최하점수를 받아도 자기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업무 지시가 명확하지 않았었다’ ‘외부 상황으로 인해 성과를 낼 수가 없었다’ 등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자기가 부족해서 남의 충고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할 사람들이 드문 것이다.

경험주의 철학가 흄(David Hume)은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라는 책에서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거의 반복적인 경험으로부터 미래에도 동일한 관계가 발생할 것이라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성에 근거한 추론이 아니라 습관에 의한 추리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과관계에 대한 추리능력을 키울 수 있다’라고 재해석한다.

다행이도 흄이 살던 18세기에 비해,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다양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가 너무 잘 형성되어 있다. 비행기로 세계 어디든 날아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인터넷에서 전 세계 뉴스를 실시간 접하는 것도, 다양한 언어로 된 책이나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럴 줄은 생각도 못했다’라며 회사에서 가정에서 친구들에게 사과했던 기억이 있다면,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는 생각의 프로세스를 습관화할 수 있도록 당장 시작해보길 바란다.

살림 머리가 꽝이었던 내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혼 10년차가 되니 가끔 살림꾼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누구나 원하는 분야에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실비아 김 현대오토에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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