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끄러워해야 할 하버드

2018-08-03 (금) 이해광 부국장·특집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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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나다.

세계 최고 명문 하버드대의 ‘아시안 입학 차별’ 논란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버드대와 아시안 단체 연합체 ‘공정한 입시를 위한 학생들’(SFFA)의 입학 차별 관련 소송 과정에서 이 대학의 인종 편향적이고 부당한 입학사정 시스템이 드러났다. <본보 7월31일자 A1면 보도>

‘dockets’ ‘the lop list’ ‘tips’ ‘DE’ the ‘Z-list’ ‘dean’s interest list‘…. 암호를 연상시키는 이런 단어는 하버드에서 입학 사정시 사용하는 내부 비밀용어다.


지원자를 소수 인종과 민족, 동문의 자녀, 기부자 친척, 교수나 직원 자녀, 선발된 운동선수 등 5개 그룹으로 나눠 우대하는 ‘팁스’(tips), 학교 기부자와 이해관계가 있거나 학교와 관련이 있는 지원자를 별도 관리하는 입학처장 리스트(dean’s interest list). 성적으로는 합격을 보장할 수 없지만 대학측이 ‘뒷문’을 통해 선발되길 원하는 ‘Z리스트’. 세계 최고의 지성의 전당이 맞는지 아연할 뿐이다.

하버드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동문자녀인 레거시 지원자의 합격률은 34% 가량으로 비동문자녀 지원자 합격률의 5배가 넘는다. 특히 하버드 교내 신문 설문조사에 따르면 레거시 학생 90%의 연 가구소득은 12만5,000달러 이상이다. ‘부유한 백인학생들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인 셈이다. 하버드대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SAT 점수만큼이나 지원자의 출신이나 동문자녀 여부, 재산 등이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하버드의 특정집단 우대 입학 정책은 우수한 아시안 지원자를 대거 걸러내는 하나의 방편이 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92년부터 2013년까지 20여년간 아시안 지원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합격률은 놀라울 정도로 매년 제자리 수준이다. 1992년 19%, 20년이 지난 2013년에는 18%를 기록했다. 아시안 합격률이 의심스러운 곳은 하버드뿐이 아니다. ‘인종’을 입학 사정 기준에 포함시킨 아이비리그도 마찬가지로 2007~2013년 이들 학교의 아시안 합격률은 12~18%에 불과했다. 이를 우연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버드대의 경우 지원자의 학업 능력과 과외 활동 퀄리티를 기준으로 하는 입학처 평가 단계에서는 아시안들이 백인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합격률은 백인보다 훨씬 낮다. 왜 그럴까. 학업능력과 과외활동이라는 객관적 기준과 달리 지원자를 대면해보지도 못한 입학 사정관들의 주관적인 ‘개인적 평가’ 항목에서는 백인보다 훨씬 낮게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아시안 지원자를 직접 인터뷰한 동문들은 백인만큼 높게 평가를 했다는 게 입학 차별 소송을 제기한 SFFA측의 설명이다.

하버드의 ‘입학 사정 흑역사’는 오래전에도 존재했다. 1900년대 초 전체의 7%에 불과했던 유대인 합격자 비율이 1922년 21. 5%까지 증가하자 당시 애봇 로렌스 로웰 총장은 ‘유대인들이 하버드를 망친다’며 난데없이 ‘인성과 적합성’(character and fitness)이라는 애매한 기준을 입학 사정 과정에 포함시키면서 유대인 합격생을 제한했었다.

그 후로 한 세기가 채 못 된 지금 ‘피해자’는 유대인에서 아시안으로 바뀌었다. 입학 사정이 아니더라도 하버드에서 아시안에 대한 차별은 오랜 기간 간과되어 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976년까지도 하버드는 아시안을 ‘소수계 그룹’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대학측은 아시안이 소수계 신입생 뱅큇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아시안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이 주도하는 캠퍼스에서 다른 유색 인종과의 결속은 물론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며 정체성마저 고민해야 했다.

하버드의 입학 차별 논란을 특정 인종 혹은 일부 영재 아시안 지원자들의 문제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대학의 비뚤어진 인종 정책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있으며 특히 많은 젊은 아시안이 이로 인해 열등감과 절망을 느끼며 분노하고 있다”는 소송 관계자의 말이 공감을 얻는 이유다.

하버드는 1636년에 설립된 이래 오랜 기간 부유층, 백인, 남성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이번 소송은 그동안 15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온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대학의 나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또 ‘아시안 입학 차별’이라는 비슷한 의혹을 받고 있는 다른 아이비리그와 명문대들의 향후 입학 전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는 10월 시작되는 재판의 결말이 벌써부터 궁금하기만 하다.

<이해광 부국장·특집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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