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VIP

2018-07-19 (목) 양주옥 /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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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부부는 결혼 31주년을 맞았다. 처음 몇 년은 무슨 대단한 날인 것처럼 챙기려 들고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했었는데 어느덧 삼십 여년을 살다 보니 그저 그날이 그날일 뿐 특별한 생각이 안 들었다. 그래도 왠지 그냥 넘어가기 섭섭해서 가까운 곳에 등산이라도 함께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늘 한 자락 없는 뙤약볕에 먼지만 날리는 좁은 길을 가자니 땀도 나고 힘이 들어 괜히 오자고 했나 은근 후회도 되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길을 둘이 걷는데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신혼 때 고왔던 남편의 손이 거칠게 느껴졌다.

작곡을 전공한 남편은 곡을 쓰고 악기를 다루며 관현악단과 교회에서 지휘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온갖 궂은일은 다하고 가족을 위해 애쓰다 보니 반백의 머리도 얼마 남지 않은, 병을 달고 사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젊었을 땐 남편보다 아이들에게 더 정성을 쏟았던 것 같고 그런 나를 남편은 늘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내 전부를 주었던 아이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남편만 내 옆에 있었다.

거친 손이 그가 살아온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그동안 남편에게 소홀했음이 새삼 미안하게 느껴졌다. 비록 등산은 힘들었지만 잊고 있었던 남편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산행이 되어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의 영원한 VIP 당신을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더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하면서 멋진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양주옥 /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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