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잘못인가?”

2018-07-07 (토)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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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거르지 않고 후회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일상이다. 대부분의 후회나 갈등은 잠깐 마음을 흔들다가 까마득히 잊혀 진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뇌에서 폐기처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후회나 갈등은 마음속에 꽁꽁 맺혀서 프로이드 선생이 말한 무의식의 세계에 숨어 산다. 평상시 의식세계에 노출되어 괴로움이나 불안을 야기하지 않도록 억압된 상태로 남아 있다. 프로이드는 이런 억압된 마음의 상처들이 가끔 꿈을 통해 나타나는 사실을 히스테리 여자환자들에게서 경험하고 후에 정신분석이론을 창조한 주춧돌의 하나로 사용했다.

뇌과학 관점에서 보면 인생여정 중에 경험한 큰 후회와 갈등은 어떤 부호로 변형되어 측두엽과 전두엽 어느 부위에 기억이란 정보로 저장된다. 그러다가 마음이 무척 괴롭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조직의 전기적 화학적 작용에 의해 슬슬 기어 나온다.

우리는 또한 ‘내 잘못인가’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자기가 한 일이나 생각에 대해 변명을 하고 싶어 한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망을 치는 것이다. 이를 정신의학 용어로는 심리적 방어기제라 부른다. 130여 전 프로이드가 처음 언급한 이래 프로이드의 딸 안나를 위시해 여러 정신의학자들을 거쳐 마무리되어 지금은 정신영역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단어다.


방어기제는 욕망과 충동 본능의 본산인 이드(Id)에 맞서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하는 초자아 사이를 잘 도닥거려 합의점을 찾아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는 자아 역할의 하나로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진화과정에서 생긴 생존 본능적 반응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서너 가지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대인관계와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내면의 심적 갈등이 이드(원초적 본능)와 연관되어 있기에 방어기제의 대부분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드의 욕망이나 외부상황의 요구가 너무 강하거나 초자아의 힘이 너무 약해 어떤 특정한 방어기제를 남용하는 경우에는 자아가 이를 잘 해결하지 못한다. 이럴 때는 무의식적으로 현실의 상황에 적응하려 하기보다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감으로써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정서적 안정을 얻으려는 병리적 방어기제가 나타난다.

‘내 잘못인가’ 하는 후회와 갈등에는 흔히 두가지 방어기제가 따라 온다. 처음에는 부정이다. 사건이나 상황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경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후 심한 마음고통을 호소하는 애도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한테 흔히 있다. 남편의 죽음을 믿지 않고 남편의 시신과 몇 주간 생활했던 환자도 있었다.

부정 다음에는 합리화다. 자신이 한 일이나 생각이 부끄럽고 괴롭기 때문에 의식 밖으로 밀어내 현실을 다르게 지각하는 것이다. 그럴 듯한 이유를 달아 정당화하려는 변명이다. 잘 알려진 원숭이의 신 포도(Sour Grape) 우화가 대표적 예이다.

존경하던 선배 한 분이 최근에 세상을 뜨셨다. 농학, 신학, 사회학 등 여러 전문영역을 두루 공부한 지성인이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주요 한인 언론인으로 오래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신 분이다. 껍데기 지식인이 아닌 강한 신념을 가지고 행동으로 보여준 분이었다.

어느 단체의 요청으로 지난 4월 초순 쌀쌀한 날 내가 정신건강에 대해 강의할 때 그 분이 참석하셨다. 신체질환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서인지 수면건강에 대해 먼저 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순서대로 강의를 하고 수면에 대해서는 계획한 시간을 넘기며 이야기를 드렸다. 강의시간 중 선배님이 간간이 기침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1시간 쯤 되는 강의를 듣고 그분은 귀가 했는데. 다음 날 입원하여 두 달 치료 받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뜨셨다.

가끔 선배님의 이른 죽음에 대해 ‘내 잘못인가’ 하는 후회에 잠긴다. 만약 내가 사월의 쌀쌀한 날씨에 강의를 안했다면, 또 선배님의 부탁대로 수면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면 그분의 신체질환이 덜 악화해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잘못을 부정하고 또 합리화시키려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무의식 속에서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방어기제가 잘 작동을 안하는 건지 혹은 잘못한 게 없다는 내 의식이 너무 강해서 방어기제가 발붙일 곳이 없는 건지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선배님의 죽음이 슬프기는 매 한가지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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