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러시아 역사 중요 사건들 붉은 광장 무대삼아

2018-07-06 (금) 권태진/변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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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행⑫

러시아 역사 중요 사건들 붉은 광장 무대삼아

각종의 조각으로 수 놓은 모스코바 지하철의 모습

대천사장교회는 수도 이전까지 러시아 황제들 묘지로 사용
성바실리 성당은 이반황제가 카잔 정복 승리 기념으로 지어

8월 22일
크레므린 (Kremlin)
호텔에서 아침 식사는 호텔 숙박료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포함되지 않아 따로 돈을 지불했다. 아침 9시에 박집사가 호텔로 왔다. 나는 자동차가 동원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온 것이다. 약간의 실망은 되었지만 비용도 적게 들고 지하철로 이동하면 지하철 구경도 하며 많이 걸으면 운동도 되기 때문에 싫지 않았다.

모스코바를 볼 수 있는 날은 오직 하루뿐이라 몇 곳만 열심히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2006년에 왔을 때는 여러 날 보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시베리아가 여행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몇 부락 걸어가 지하철로 내려가 타고 내린 곳이 Tverskoy District에 위치한 혁명의 광장(Revolutionary Square)이다. 혁명의 광장 지하철역은 각종의 조각과 벽화 등으로 꾸며져 지하철인지 미술관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지난번 여행 시 지하철의 깊이가 깊다는 것을 체험했지만 혁명의 광장 지하철역은 지상에서 84미터나 내려가 있다. 지하역에서 나와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붉은 광장에 도착하고 보니 크레므린으로 들어가는 후문에 사람들의 대열이 길게 늘어져 있다. 박집사는 매표소는 다른 곳이라고 하면서 붉은 광장에 멀리 떨어진 정문 매표소로 안내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잡을 이루어 1시간 이상 줄을 서 있은 후 입장권을 구입했다. 넓은 크레므린 안에 많은 건물들이 있으나 공개되는 건물은 몇 밖에 없다. 대천사장교회(Archangel Cathedral)가 공개되어 들어갔다. 1508년에 봉헌된 이 교회는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수도가 이전되기 전까지 러시아 황재들의 묘지였다.

황재들뿐만이 아니라 왕비와 자녀들까지의 관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황재들의 시체는 수도가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옮겨지면서 그곳으로 옮겨 갔으며 피터 2세 황재만 이곳에 남아 있다. 볼세비키 혁명당시 전투기간 동안에 손상되었으며 그 후 패쇠되었다가 소비에트 시대인 1950년대에 박물관으로 보존되었으며 1992년 이후 교회로 이관되었다. 여기에는 이반 테리블의 아들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Demetrius 가 이곳에 있다.

성벽은 1156년에 건축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 재건축되었다. 성벽 총 길이는 2,235m로 성벽에는 18개의 군사용 탑이 있다. 이 안에 있는 건축물들은 1485-1495년에 이태리 건축예술가들과 건축 기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모스크바 크렘린은 중세 유럽 성 건축예술의 제일가는 본보기들 중 하나이다. 모스크바 중심에 위치한 건축 예술의 기념비로서 러시아의 심장이자 러시아의 위대함의 상징이다. 넓은 크레므린 광장 안에는 푸틴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 있지만 부근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크레므린은 적을 막으려는 요새로 건축되었지만 러시아에서 크레므린은 바로 소련정부를 지칭해왔다. 왜냐하면 그레므린에 정부가 들어가 있으며 대통령 집무실이 크레므린에 있기 때문이다.

붉은 광장 (Red Square)
크레므린 성을 돌면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도 심심치 않았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광장 정원 나무 밑에서 잠간 쉬면서 휴식을 취하고 붉은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광장은 크레므린 벽과 붙어 있지만 크레므린과는 별개다. 경의적인 건축물로 둘러싸인 조각돌로 포장된 4각형의 넓은 광장을 걷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만 이날은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국군악대도 참가하는 세계군악경련대회가 광장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그 준비를 위해 모두가 막혀있어 부분적인 곳만 걸을 수 있었다. 광장 주위의 붉은 색과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크레므린 벽과 바실성당 사이의 작은 땅 이름이 ‘krasnaya’로 이 뜻은 ‘붉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황재가 광장전채지역에 적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붉은 광장은 크렘린이 존재해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광장을 무대로 삼아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사건들이 전개되어 왔다. 붉은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행렬과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현재 붉은 광장은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붉은 광장은 세계의 많은 유명한 광장들과 당당히 비길 만하다. 이는 그 아름다움과 건축 예술적 원숙함에 있어, 명성이 높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파리의 화합의 광장과 경쟁할 만하다.?크렘린과?붉은 광장은 1990년에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성바실리성당도 붉은 광장에 포함되어 있다. 박집사가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표를 샀다.

성 바실리 성당 ((Saint Basil’s Cathedral)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성 바실리 성당은 Ivan the Terrible의 명령으로 카잔을 정복한 전쟁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1555-1561년에 세워진 것이다. 러시아 건축의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겉모양이 눈부시게 화려한 이 성당의 최초의 색깔은 크레므린의 힌 돌과 맞추어 흰 색깔에 돔만 금색이었다. 그러나 건축한지 200년이 지나서 색칠을 하기 시작했으며 요한계시록의 천국에 대한 성경적 묘사에서 색깔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대성당은 9개의 돔으로 된 교회들로 구성되는데 가장 높은 돔으로 된 중재교회(intercession church)를 둘러싸고 있다.


교회건축 후 27년이 지난 1588년 지방 성인 바실리(Basil or Vasil)의 무덤위에 다시 교회를 세워 9번째의 교회가 되었다. 성 바실은 천민인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최초의 일은 구두수선 견습공이였지만 그는 상점도둑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도 하였으며 그는 예언을 하여 적중하기도 했다. 그는 붉은 광장에 나체로 쇠줄을 몸에 감고 다니며 이반 테리블이 교회에 관심이 없으며 죄없는 사람들에게 난폭하다고 황재 이반 테리블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가 죽었을 때 황제자신이 운구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건축가의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Barma or Postinik Yakovlev로 알려지고 있다. 이 성당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반은 이 건축가가 다른 나라에 또 이러한 아름다운 성당을 딴 곳에도 건축할가 염여하여 건축가의 눈을 빼고 장님이 되게 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Yakovlev는 1560년 말까지 살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9개의 교회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당이 있는 교회가 아니다. 일종의 작은 채플이다. 4명의 성악가가 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 잠시 멈추었다. 그 노랫소리가 웅장하게 마이크로 폰 사용하는 것같이 울려 퍼졌다.

각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숫자는 고작 20-30여명에 불과하며 실내는 교회마다 다른 모형으로 장식되어있다. 별로 높지 않은 이 교회를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내려오는 길을 잃고 9개의 채플이 있어 출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격었다.


이반 테리블 (Ivan the Terrible) 의 아들 죽인 이야기

이반 테리블 황재의 이름은 Ivan Vailyevich 이며 27년간의 황재 재임 시 러시아를 크게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무섭다’는 Terrible이 아니라 현대의 영어로는 ‘두려운’ Formidable이 정확한 용어라고 한다. 무서운 황재가 아니라 위력이 당당한 두려운 황재가 정확한 평가라고 한다. 이반 테리블은 주위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작은 국가에서 제국으로 국토를 크게 확장시켰으며 용기 있고 적들이 무서워하는 황재였다. 그는 지적이며 신앙심이 깊었으며 외교에도 수완이 능했으며 예술과 무역의 후원자였으며 소련 최초의 인쇄소를 설립하도록 했다. 대학살의 도시 노고로드 시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평민들에게는 인기 있는 황제였으나 국민들 특히 귀족들을 엄하게 다스려 복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을 죽인 사건은 그의 역사에 지어질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반 이바노비치 (Ivanovich)는 이반 테리블의 둘째 아들로 황재 승계자로 지목된 사람이다. 그는 명석하며 신앙심도 있었으며 문필에도 능했다. 어린나이로 한때 젊령당한 국가 Livonia 포로가 황제를 칼로 죽이려 할 때 급히 죄수를 찔러 아버지를 구출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밀접하고 좋았다. 12살에 아버지의 권유로 스웨덴 공주와 결혼을 했으나 아기가 없어 황재에 의하여 쫓겨났으며 둘째의 부인도 꼭 같은 신세였다. 3째 부인을 맞아 임신 중이었다.

Livonia 전쟁 후반기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전쟁의 방법 때문에 의견이 달라지고 관계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것은 1581년 11월 15일 임신한 아들의 셋째 부인의 가벼운 옷차림을 본 황재가 화가 나 그녀를 손짓을 가했을 때였다. 부인의 비명으로 달려간 아들은 부인을 방어하면서 화내면서 소리질렀다. “아버지는 나의 첫 부인을 수녀원으로 보내고 둘째 부인도 꼭 같이 했다. 이제 임신한 셋째 부인을 때려 배속에 있는 아이를 죽게 했다.”

그 후 부인은 유산을 했다. 이 일로 순종하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항했으며 아버지는 아들이 반역을 부추기고 있다고 아들을 비난했으나 아들은 그 것을 부인하면서도 Livonia 전쟁에서 아버지의 실패에 대하여는 굽히지 않았다. 이에 극도로 화가 난 아버지는 왕의 권위를 표시하는 쇠막대기로 아들의 머리를 쳤다. 한 번 내려쳐 바닥에 스러진 아들은 거의 의식을 잃었으며 머리에는 피가 흘렀다. 바로 즉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몸을 던져 아들을 안고 얼굴에 키스를 하면서 피를 멈추려고 하면서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나를 저주해 주세요, 내가 아들을 죽였습니다, 내가 아들을 죽였습니다.” 아들 이반은 잠시 의식을 회복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헌신하는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고 가장 소박한 아버지의 종으로 죽습니다.”

교회에서 나와 광장을 걸으면서 광장에 접한 식당들에서 점심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박집사는 고급백화점이 있는 이 광장 식당의 음식 값이 비싸다고 하면서 이곳을 피했다. 광장을 벗어나 시 번화가로 나왔다. 여기저기 식당이 있어 들어가자고 했으나 박집사는 역시 가격타령이었다. 내가 좋은 식당을 구경하기보다 박집사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가끔 좋은 음식관광도 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식당에 들어갔다.

날씨도 좋고 기온도 온화하여 실외 테이블을 요청하여 지나가는 사람들과 바깟의 모습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박집사가 손짖으로 볼쇼이극장을 가리켰다. 불과 몇 백 미터 밖의 건물이다. 정면이 8개의 높은 돌 기둥으로 세워진 마치 큰 관청처럼 웅장하게 새워진 흰 석조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유명한 볼쇼이발레연주를 한번 보고 싶어 지난번 방문 때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른극단의 발레를 보았다. 볼쇼이 극장(Bolshoi Theaer) 은 발레와 오페라 극장으로 1825년에 오픈된 모스코바의 랜드마크다. 1776년에 설립된 볼쇼이 바레단과 오페라단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유명한 것 중에 속한다. 특히 볼쇼이발레단은 여러차례 세계를 순회하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발레단이다. 현재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200명이상이다. 6년간의 보수공사가 끝나고 2011년에 재개관하였다.

모스코바대학 (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

점심 후 모스코바대학을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서 지하철로 러시아 제1의 대학 모스코바국립대학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교정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가 넘었다. 높이가 702미터 42층 총 넓이 약 1천1백만 스퀘어 피트에 해당하는 본관은 대학 건물이라기보다 거대한 오피스 건물 같다. 교정의 건물이 높지 않은 세계 유수대학과는 다른 형태의 켐퍼스다. 방학 때라 교정이 한산하여 대학 같은 분위기가 들지 않았지만 세계에서 유명한 대학의 하나다.

1755년 과학자 화학자 무리학자 역사학자 심지어 시인이기도 한 Mikhaylo Lomonosov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L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라고도 칭한다. 학생은 총 47,000여 명 그 중에 대학원생이 7000명이며 교직원은 5000명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마침 방학 중이라 본관에 들어가는데 통재되어 들어가지 못했다. 건물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교정만 둘러보고 모스코바시내를 내려다보는 본관정원으로 갔다. 예쁜 꽃들로 단장된 정원에는 본 대학출신 명사들의 동상이 한 줄로 길게 늘어져 있어 이 대학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정원 끝이 Sparrow Hill 이다. 한때 레닌언덕이라고 불렸던 이 언덕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모스코바에서 제일 높은 지점의 하나인 이곳에서 모스코바 시내를 내려다보게 되며 또 그 밑에는 모스코바 강이 흐르고 있다. 강가에 1980년 하계올림픽이 열렸던 Luzhniki 스테디움도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이곳은 두 번째 인데 2006년에 왔을 때 안내자는 바로 옆에 있는 모스코바대학에 대하여는 언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언덕에 모스코바대학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호텔로 오는 길에 호텔 호텔부근에 있는 Belorussky 열차 역에 오니 저녁 7시경이 되었다. 다음날 가는 공항 행 열차 시간을 확인하기 위하였다. 박집사는 공항으로 함께 가 줄 수 있다고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사양했다.

8월 23일
아침 9시에 박집사가 호텔로 왔다. 자동차가 없는 분이라 대중교통이 교통수단이다. 지하철을 타고 Balashikha란 작은 모스코바 외곽도시로 향하였다. 이곳에 1991년부터 러시아선교사로 천사합창단을 조직하여 뉴욕에도 여러 차례 공연을 했던 김바울 목사가 후원하고 있는 교회를 가보기 위하였다.

김 선교사 교회는 원래 모스코바 시 중심가에 있었지만 2년 전 Balshikha에서 고려인 목사가 세운 교회와 통합하고 고려인 목사가 후임으로 전담하고 있는 교회다. 김 목사는 미국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일 년에 수차례 모스코바를 방문 선교를 계속하고 있다. 김 목사가 천사합창단을 이끌고 20여 년 전에 뉴욕에 왔을 때 단원 몇 명을 우리 집에 하루 유숙시킨 것이 첫 인연이 되었으며 2006년 모스코바를 갔을 때 당시 모스코바 시내에 있었던 김선교사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다.

지하철을 여러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모스코바와는 다른 모습의 지역이다. 교회까지 가는 지하철이 없어 이곳에서 버스를 타야한다고 한다. 버스는 한국의 동란 이후 서울에서 많았던 합승버스처럼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러시아인이 아닌 구 러시아 소수민족사람이 운행하는 차다. 10여명 정도 탈 수 있는 자동차에 올랐을 때 내 옆에 앉은 Max라는 젊은 남자가 박집사에게 말을 건냈다. 영어를 할 수 있어 나도 끼어들었다.

화가이면서 컴퓨터 그라픽을 하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다. 여자 친구와 함께 남부 러시아를 여행하는데 히치하이킹으로 했다고 한다. 미국은 범죄관계로 히치하이킹을 금지시키고 있는데 러시아에서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했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다. 젊었을 때 하이왜이에서 손을 드는 사람들을 태워 본 경험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강도를 당한 후 오랫동안 고생한 것을 안후부터는 히치하이킹에 응해주지 않았다. 교회를 잠간 들어다 보고 곧 모스코바로 향했다. 뉴욕을 출발 일본 경유 러시아 여행을 마치고 27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날 마음이 기쁘다. (끝)

<권태진/변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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