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213) 제35대 John F. Kennedy 대통령⑤

2018-06-29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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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line Bouvier Kennedy (계속)

계부의 주선으로 Washington Times Herald 에서 짧은 column 을 쓰는 사진기자로 일년여 일하다가 JFK 와 결혼을 했다. 원래는 신문사의 Receptionist 로 채용되었다가 하루만에 주필에게 요청하여 기자로 일하게 되었었다고 한다. 그녀의 친정쪽 친척들이 별로 화목을 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그녀는 Kennedy 가의 질서있고 화목한 관계를 아주 좋아했었다고 한다. JFK 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에 어머니쪽과 계부쪽 친척들이 취임식행진후에 백악관에 모였었는데 Jackie 는 2층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었다고 한다. 민망해진 어머니가 올라가서 내려 올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내려오지 않았었는데 어쩌면 그녀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 이었던것도 같다.

암살된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들은 대게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FDR 이 사망한후 Eleanor Roosevelt 는 Truman 이 취임선서를 할때에 백악관에 있으면서도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JFK 가 암살된후 Lyndon B. Johnson 부통령은 Jacqueline 의참석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JFK 사망 99분 후에 Air Force One 에서 지방법원 판사의 집전으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였는데 그녀는 암살당시 튀어나온 JFK 의 피가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참석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었다.


현직으로 재직하다 사망한 대통령 미망인들은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Jackie 는 JFK 의장례절차에 여러가지 지시를 했었으며 JFK 의 묘소에 영속적으로 불타고 있는 Eternal Flame (영원한 횃불) 은 그녀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장례행렬때 검은 veil을 쓰고 상복을 입고 마차수레에 실린 JFK 의 관을 따라서 걸어갔었고 조문차 참석한 외국원수들과 침착하고 품위있게 인사를 나누었었다.

Jackie 는 JFK 의 암살후 New York 시에서 어느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두자녀를 양육하며 살았었는데 가끔 gossip 기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었다. 그녀는 언론인들을 기피한다고 말하였으나 그녀의 의상, 언행, 나타나는 장소들이 언론의 눈에 잘 띠었었다고도 한다. 그녀는 사회, 여성문제등에 대한 대화보다는 예술, 예술가에 대해서, fashion 과 design 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좋아했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년봉이 10만불 정도였을때에 일년에 designer 옷에 4만6천불을 썼었다고도 하며 유명한 Designer Oleg Cassini 의 dress 를 백여벌이나 샀었다고도 했다. 그녀는 10 best dressed women 속에도 들어 갔었다는데 그녀의 머리, 의상등을 본받은 여성들이 많았었다는 것으로 보아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었던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대통령의 First Lady 가 아니라 Fashion Association 이나 Design Association President 의 First Lady 를 했었으면 더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Washington 시내의 빈민가들이 역사적 가치가 있음으로 철거하지 말라고 하였었으며 JFK 의 암살후
New York 에 사는 동안에 새건물을 짓기 위해서 역사적 유물인 Grand Central Station 을 철거할 철도회사의 계획이 진행중이었는데 Jackie 도 Save Grand Central Committee 의 위원장으로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벌려 그 건물이 철거되지 않고 지금까지 New York 시의 역사유물로 보존되어 사용되고 있다.

험한 파도처럼 닥쳐오는 국제문제들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운영해본 제일 큰 기관은 그 자신의 상원의원 사무실밖에 없었던 43세의 젊은이 JFK 가 대륙처럼 큰 땅덩어리 미국을 과연 제대로 움직이어 나가겠느냐 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국제정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대립과 두이념을 상징하는 미국과 쏘련의 불화가 차츰 강도가 더 높아져 가고있던 형국에서 정치경험이 충분치 않은 JFK 가 잘 대처해 나갈수 있겠느냐 라는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었다고 한다.

JFK 는 유능한 각료들을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확대시켰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국제문제들이 돌출하자 그의 경험미숙이 노출되기도 하였지만 미국이 큰전쟁에 휩쓸리는것은 피해 나갔었다.

국무장관에는 침착하고 과묵한 Rockefeller Foundation 의 사장 Dean Rusk 를 임명하였고 국방장관에는 Ford 자동차회사의 Robert S. McNamara 사장을 임명하였다. JFK 보다 한살 더 많았던 McNamara 는 거대한 조직을 더 잘 운영하는 새 전략을 잘 구상해내는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었다고 한다. JFK 가 무리한 경제정책을 채택할수도 있을것이라는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 New York 의 부유한 투자금융가로써 공화당원이었던 C. Douglas Dillon 을 재무장관에 임명하였다. JFK 는 변호사인 자기의 동생 Robert Kennedy 를 Attorney General (미국에는 법무부장관은 없고 검찰총장격인 Attorney General 이 법무부인 Department of Justice 의 수장임 ) 에 임명하였다.

Robert 는 그때까지 법무부 에서 잠간 일한적이 있었고 악명 높았던 Joseph McCarthy 상원밑에서 조사요원으로, Richard Nixon 이 하원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할때에 조사요원으로 근무한적이 있는 정도이어서 Attorney General 에 임명되기에는 다소 경력이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JFK 의 대통령선거를 막후에서 악착스러웠으나 능란하게 지휘했었었다. 임명초기에는 “정실인사” 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Robert 는 자기 형이 가장 신임하는 버팀목 역활을 하였으며 재임중 강력한 Attorney General 이 되었었다.


젊고 활기에 차서 출범한 Kennedy 행정부는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을 시원하게 처리할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출발하였었다. 그러나 JFK 는 닥쳐오는 국내외 문제들이 단순하지도 않고 쉽게 해결될수 있는것들도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제일 먼저 닥쳐온 것들이 국제문제들 이었었다.
불란서 식민지이었던 인도차이나가 해방되면서 생긴 나라들중의 하나가 Laos 이었다. CIA 의 은밀한 도움으로 친서방정권이 수립되었었는데 Laos 의 공산주의자들과 중립주의자들은 친서방정권을 전복하고자 하였다. Ike 는 퇴임시에 JFK 에게 “아마 Laos 문제는 무력을 사용해야만 될것 같습니다.” 라고 설명해 주었다. JFK 는 1961년 3월에 “미국은 Laos 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병력을 동원할것이다” 라고 경고하였다.

JFK 의 측근들중에는 미군을 파병하자고 건의하였으나 JFK 는 영국의 중재로 쏘련과 Laos 에 중립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1962년 6월에 세 계파가 참여하는 연합정부가 수립 되었으며 7월에는 Geneva 에서 미쏘영 및 다른 11개국들이 모여서 Laos 를 중립국가로 지키자는 조약을 체결하였었다. 무력보다는 외교로 공산화 방지에 성공한것처럼 보였었지만 2년후에 공산주의파인 Pathet Lao 가 탈퇴하면서 Laos 는 다시 내전에 들어갔고 결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미국의 남단 Key West 에서 불과 90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는 Cuba 에서는 Fidel Castro 의 공산혁명이 성공하여 미국의 투자자산들이 압수되고 본격적인 공산화가 진행중이 었으며 차츰 과격해지는 반미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좁쌀만한 혹이 점점 커져서 미국의 암으로 될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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