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멕시코와 나눈 ‘카잔 대첩’ 기적

2018-06-29 (금) 김동우 부국장·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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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의 미’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라고 만들어진 말이 아닌가 싶다. 한국 축구가 유종의 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러시아 월드컵 무대에서 기분 좋게 퇴장했다.

대회 첫 두 경기에서 스웨덴과 멕시코에 연패해 엄청난 비판과 비난에 직면했던 한국 대표팀은 27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우승후보 독일을 2-0으로 꺾는 역대급 반전 드라마를 썼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독일을 월드컵에서 탈락시킨 역사적인 ‘카잔 대첩’으로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대회장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독일이 어떤 팀인가. 월드컵 4회 우승에 빛나는 영원한 우승후보이고 현 FIFA랭킹 1위이자 디펜딩 월드컵 챔피언이다.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유럽예선에서 유일하게 10전 전승을 기록했고 그 10경기에서 무려 43골을 넣고 단 4골만 내주는 경이적인 성적을 남겼다. 4년 전 브라질 대회 4강전에선 최고 우승후보였던 홈팀 브라질을 7-1로 괴멸시켜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무시무시한 ‘전차군단’이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조별리그에서 떨어진 적이 없는 팀이다. 그런 팀을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침몰시켰으니 말 그대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인 잉글랜드의 축구영웅 게리 리네커는 지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에 패한 뒤 “축구란 간단한 게임이다. 22명이 90분간 볼 하나를 쫓아다니다가 결국엔 독일이 언제나 이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의 월드컵 최다골 기록(10골)을 보유한 수퍼스타지만 끝내 독일만큼은 꺾지 못했던 깊은 좌절감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 한국이 독일을 꺾는 쇼킹한 파란을 일으키자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업데이트했다. “축구란 간단한 게임이다. 22명이 90분간 볼 하나를 쫓아다니다가 결국엔 독일이 ‘더 이상’ 언제나 이기지 못한다. 과거 버전은 이제 역사로 국한됐다”

한국의 승리는 ‘기적’이었다. 만약 동시에 벌어졌던 같은 조 경기에서 멕시코가 스웨덴을 꺾어줬더라면 한국에게 16강 티켓까지 안겨준 ‘순도 100%’ 기적이 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멕시코가 스웨덴에 0-3으로 참패하면서 한국은 ‘50%의 기적’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기적 50%는 ‘멕시코의 몫’으로 돌아갔다. 대회 첫 두 경기에서 독일과 한국을 연파해 16강 진출을 확신했던 멕시코는 이날 그야말로 ‘용궁에 다녀오는’ 체험을 했다. 스웨덴에게 후반 내리 3골을 내주고 완패하는 바람에 독일이 한국을 꺾기만 하면 그대로 16강에서 탈락하는 처지였다. 독일이 한국을 꺾는 것은 기정사실로 여겨졌기에 멕시코 전체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상상도 못했던 기적이 일어났다. 코레아의 태극전사들이 ‘전차군단’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텼을 뿐 아니라 경기 종료 직전 연속골까지 터뜨려 기적 같은 2-0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미 승부가 기울어버린 멕시코 경기 대신 한국-독일전 중계를 지켜보며 가슴 조리고 진땀 흘리던 멕시칸 팬들은 한국이 안겨준 이 기적 같은 선물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며 환호하고 또 환호했다. SNS에선 “한국이 멕시코를 구했다”, “한국은 멕시코의 수호천사”란 감사와 찬사의 글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멕시칸 라디오들은 이날 하루 종일 인기 절정의 글로벌 수퍼스타 K팝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히트곡을 틀며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멕시코시티에선 수많은 멕시코인들이 한국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코레아, 코레아“를 연호했고 “한국은 이제 멕시코의 형제다. 한국인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멕시칸이다”라고 외치며 한국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에어로 멕시코’ 항공은 자사 트위터에 ‘에어로 코레아‘(Aero Corea)라는 로고가 붙은 비행기 사진을 올리며 한국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한국행 항공료 20% 할인혜택을 제공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비슷한 스토리가 수도 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카잔 대첩’은 기적이었다. 비록 기적의 50%를 멕시코와 나눠가져야 했던 것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매일 멕시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남가주 한인들 입장에선 멕시칸 친구들로부터 끊임없이 “땡큐 코레아”라는 인사를 받는 것이 기분 좋지 않을 수 없다. 월드컵이 안겨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김동우 부국장·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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