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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10)제35대 John F. Kennedy 대통령②

2018-06-08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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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K의 부친 Joseph P. Kennedy 는 일찌기 무자비한 수단으로 거부가된 사업가이었는데 밀주수입등에도 손을 댔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그는 사업으로 축재한 재산을 증권에 투자하였는데 투기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치부를 하였었다고 한다. 그시절에는 증권거래가 엄격한 규제가 없이 몹시 혼란스러워서 투기와 불법이 횡행했던 때이었다. 드디어 FDR이 1932년에 증권거래법을 입법하고 증권거래위원회 (SEC) 를 설립하고 초대위원장에 Joseph Kennedy를 임명하였었다. 이 임명을 보고 “여우에게 닭장을 지켜달라”는격과 같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FDR은 자신의 경험으로 증권거래의 약점들을 Joseph P. Kennedy 만큼 잘 알고 단속할수있는 적임자가 없다고 반박 하였었다고 한다.

자신도 대통령이 되어보고자 했던 야망이 있었었다는 Joseph Kennedy 는 대통령으로 FDR 을 열열히 지지하였었고 그 공로로 그는 주영 미국대사에 임명 되었었다. 이 인사는 미국이 Irish 를 영국대사로 임명함으로써 영국을 몹씨 홀대하는 것이라고 해석될수도 있었던 일이 었다고 한다. 만일 미국이 2차 세계대전중에 조선사람을 주일 미국대사로 임명하였다면 그때 영국이 느꼈던 만큼의 충격을 일본도 받았었을 것이었다
자신의 대통령당선의 꿈이 이루워지기 어려운 것임을 깨달은 Joseph 은 아들들의 “왕세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렸다. 네아들중 한명은 꼭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이었다.

네아들중 제일 대통령깜이라고 온갖 기대를 걸었었던 큰아들 Joseph P. Kennedy, Jr. 는 제2차 세계 대전에 해군조종사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둘째 John은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은 사람이었으나 1946년에 29세로 집안의 배경으로 하원의원에 당선 되었을때 까지는 장차 무었을 해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지 못한 사람같았었다고도 한다.


셋째 Robert(Bobby)도 한몫은 충분히하는 사람으로써 만일 민주당 대통령공천 선거 운동중 암살되지만 않았었다면 대통령에 당선될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막내 Edward (Teddy)는 최연소 상원의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최고령 원로 상원의원이 될때까지 진보적인 민주당 지도자 이었으나 심각했던 부부간의 불화와 아마 그것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는 과도한 음주 및 너무 빈번히 소문이 났던 염문때문에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웠던 인물이 었다. 여하튼간에 네명씩이나 대통령깜 풍년이 불었던 대단한 Kennedy 집안이었었다. 그러나 세딸중 한명은 저능아로 촐생하여 평생을 병원에서 보냈고 네아들중 막내만 장수로 자연사 하였고 큰아들은 전사, 두째, 셋째는 정치적 암살이라는 끔직한 참극을 겪은 미국의 비극적 “귀족”집안이 었었다.

새까만 정치후배 JFK 대통령후보의 부통령후보직을 수락하는 노련한 정치인 LBJ
1960년의대통령선거가 닥아오자 공화당측에서는 Nixon 부통령과 1958년에 New York 주지사로 당선된 Nelson A. Rockefeller 가 경합을 하였었다. 미국 최고의 거부집안 아들로 항상 활기에 넘쳐있던 Rockefeller 는 자유주의적 (liberal) 성향을 가졌던 사람으로써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공화당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공천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알고 1959년 12월에 출마를 포기하자 Nixon 은 1960년 7월에 무난히 대통령후보로 공천되었으며 자유주의 계파들과 화해하기 위하여 Massachusettes 주의 연방상원을 지낸후 주 UN 미국대사를 하고있던 Henry Cabot Lodge 를 부통령후보로 지명하였다.

한편 8년간이나 대권을 공화당에게 빼았긴채 야당노릇을 해오던 민주당은 1960년의 선거에서 정권을 회복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주요 후보자들이 전부 연방 상원의원 들이었다. 마흔두살로 후보자들 중에서 정치경력도 제일 적고 최연소자 이었던 Massachusettes 주의 John F. Kennedy, 본직업이 약사이었으나 Minneapolis 시장을 거쳐서 상원에 진출한후 탁월한 달변으로 FDR 과 Truman 류의 자유주의 계통의 대변자이던 Hubert Horatio Humphrey, 거의 25여년의 상하의원 경력을 가진 상원의 민주당 원내총무로써 남부주인 Texas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념을 가졌던 진보주의자로써 노련한 정객이었던 Lyndon B. Johnson, 다른 세 후보들 보다는 한격이 떨어져 보이던 Missouri 주의 W. Stuart Symington 상원의원등이 었었다. 이 네상원의원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지난 두번의 공천대회때 처럼 당론이 분열될 경우 또 한번 더 “징발”될 기회를 관망하고 있던 사람이 Adlai Stevenson 이었었다. 그해의 공천경쟁에서 Symington 과 Stevenson 은 별로 비중이 없는 후보들이었다.

초장에 세후보중 가장 활기가 있고 언론의 집중적 관심을 끌었던 사람이 선두주자격 으로 보이던 Humphrey 이었었다. 비교적 원만한 정치로 미국인들에게 안정감을 주어왔던 Eisenhower 대통령에게서는 노인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던 국민들도 있었을 것임으로 아직 젊은 청년같은 인상을 주었던 인물좋고 똑똑하고 활기에 넘쳐 보이던 Kennedy 는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었지만 국회내에서의 투표성향을 보면 실은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의원으로써는 별로 탁월한 활동이 없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JFK는 하원, 상원에 연속으로 당선 되었던 것으로 보아 선거전략에는 능숙했던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가지의 큰 약점들이 있었다. 그가 천주교인이라는 것과 Ireland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민주당 중진들은 천주교인이라는 것이 더 심각한 약점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정당의 대통령후보로 공천이되기 위해서는 우선 각주의 정당별 공천선거 (primary 인데 우리말로는 “예비선거” 라고 잘못 불리우기도 하는) 승리를 많이 하여야 한다.
주마다 투표일자가 다른데 매번의 대통령선거에서 인구수는 아주 적은 주이지만 제일 먼저 공천투표를 하는 까닭에 New Hampshire 주의 primary 는 그해 국민들의 성향을 예고해 주는 것쯤으로 생각하여 매우 비중이 높게 관찰되고 분석된다.


1960년도에는 West Virginia 주가 첫 민주당 공천투표를 하게 되었다. 유권자 95% 가 개신교도들인 West Virginia 는 Kennedy 의 “천주교도”임이 얼마나 심각한 약점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첫 test case 이었다. Joseph Kennedy 는 막대한 선거자금을 투입하였고 Kennedy 도 필사적인 선거운동을 하였었다고 한다. “놀라웁게도” Kennedy 는 West Virginia에서 압승을 하였다.

이 투표결과로 Humphrey 의 기세는 완전히 꺽여버렸으며 후보자의 종교는 치명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것이 입증되었었다. 어려운 첫 관문을 통과한 Kennedy는 다른 주에서도 좋은 결과를 거두어 내어서 단연 선두주자가 되었었다.

Los Angeles에서 열린 전당공천대회에서 Johnson 의 심각한 도전을 받았었으나 Kennedy 는 첫번 투표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공천이 되었다. 공천경쟁의 후유증으로 심각하게 분열이된 당을 융화하고 남부와 서남부쪽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서 Kennedy 는 Johnson을 부통령후보 로 지명했다. Kennedy 가 처음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을때 이미 민주당 중진의원 이었던 정치 대선배 Johnson 의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울수도 있는” 일이었다. 초선 의원은 자기당의 원내총무에게 잘 보여야 원하는 상임위원회 배정을 받을수가 있는 별볼일 없는 위치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Johnson 이 Kennedy 의 지명을 받아드리자 많은 사람 들이 놀랐었다고 한다.

물론 Johnson 은 잘 계산된 정략에서 새까만 정치후배의 지명을 수락하였지만 후일의 미국역사는 이때의 Johnson 의 “굴욕적인 부통령후보 수락”이 미국을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었는지를 입증하게 된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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