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내포비아, 의사의 고충

2018-06-01 (금)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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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내포비아, 의사의 고충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은퇴 한 해를 남겨두고 새 환자는 되도록 보지 않도록 진료방침을 정했다. 환자를 배려하고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정신과 환자는 의사를 믿은 후 자기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신뢰관계를 쌓는데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말년에 본의 아닌 구설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당직 날 응급실을 통해 의뢰된 환자들은 받지 않을 수 없다.

“약이 떨어져 약 타러 왔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남자가 술 냄새를 풍기며 조금 떨리는 손으로 빈 약병을 내밀었다. 약은 응급실의사가 처방해준 3일분의 자낵스(xanax)였다. 언뜻 보기에 알콜중독에 벤조(benzodiazepine) 계통 진정제 남용자 같았다. 응급실 의사는 이런 환자에게 보통 3일에서 일주일 간 약물을 처방하며 일반의사나 정신과의사한테 가라고 하면 임무 끝이다. 일반의사는 다시 환자에게 2주간 약을 처방한 뒤 정신과의사에게 의뢰하기 일쑤다.

최선의 방법은 환자를 재활 치료원에 입원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대부분 입원을 거절한다. 의사가 조금 강하게 나가면 이번만 약을 처방해 주면 다음에는 재활치료원으로 가겠다고 애원한다. 처방을 안 해줄 수도 없는 게 환자가 알콜과 자낵스로 인한 금단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자낵스를 오래 복용하다가 갑자기 끊거나 용량을 급격히 낮추면 금단증상이 나타난다. 증세는 보통 손발이 떨리고, 불안하여 서성거리고, 몸살 걸린 것 같이 콧물에 몸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나른해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게 된다. 또 손발이 가끔 저려오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밤에 잘 때 땀을 많이 흘린다.

벤조계통 약물은 뇌세포의 흥분상태를 억제하여 마음을 차분히 해주는 GABA란 뇌신경 전달물질의 효능을 강화시켜준다. 그래서 진정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70년대에는 밸리움(Valium)과 리브리움(Librium)이, 1980년대 이후에는 자낵스(Xanax), 아티반(Ativan), 클로로핀(Klonopine)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벤조 진정제는 또한 심신을 이완시켜 밤에 잘 자게 해주는 수면제의 역할, 근육경직과 통증을 도와주는 항경련제, 금단증상 치료제로서 효과가 좋지만 이에 못지않게 부작용 또한 많다. 의존성이 강해 약을 탐닉하는 습관적 행동, 약을 복용하다보면 처음 용량으로는 효과가 떨어져 용량을 높여야 되는 약물 내연성을 보인다.

의존성과 내연성은 장기복용을 부추겨 약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무기력 상태인 중독의 늪에 빠지게 한다. 그런 이유로 미 정신의학협회는 벤조 진정제 처방은 2주 이상 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지만 실제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그 지침을 따르기는 아주 힘들다.

자낵스 남용자에 의하면 자낵스는 자신의 혼을 빼앗아 의식 밖으로 끌어내 도망자로 만듦으로서 현실세계의 고통과 갈등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한다. 자낵스는 벤조 진정제 중 가장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약물로 특히 무대 스트레스와 중압감에 시달리는 가수와 배우들이 자낵스를 먹고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노래나 연기를 한다고 한다.

일단 중독이 되면 끊기가 매우 힘들다. 갑자기 끊으려 하면 금단증상이 나타나 다시 복용하기 마련이다. 반드시 의사의 지시대로 시간을 두고 소량씩 줄여가면서 끊어야 한다. 최근 자낵스 남용과 중독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유명 랩가수가 자낵스에 오피움을 혼합한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자낵스 남용자로 의심되는 환자가 약 처방을 요구하면 의사들은 먼저 두려움이 앞선다. 일종의 자내포비아(Xanaphobia)이다. 대부분 매우 강력하게 또 간절하게 요구해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는다. 불친절하게 딱 거절하면 신체상 위험을 느낄 경우도 생긴다. 의사들은 치료지침서와 치료 현장 사이의 여러 문제점과 자내포비아를 지혜롭게 극복해야 환자를 잘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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