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민이 입는 전통의상은 조선시대 고관들 옷처럼 화려
▶ 몽골의 후예답게 말들이 뛰노는 모습 배경담은 곳 많아
부랴트 종족의 옷을 입은 필자
주민 대부분은 불교신자로 그리스도인 안좋아해
작은 도시임에도 크고작은 박물관 10개 이상 있어
8월 8일
울란우데 (Ulan-Ude)
울란우데는 부랴트 공화국(Republic of Buryatia)의 수도다. 부랴트 공화국은 몽고족인 부랴트의 자치공화국이지만 러시아 백인이 대부분이며 부랴트족은 30%미만이다. 나는 몽고족을 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이 도시를 방문 스케줄에 포함했다. 모스코바까지 5,640km 떨어져 있으며 바이칼 강까지는 100km 거리에 있다. Uda강과 바이칼호 물의 50%를 차지하는 Selenga 강 두 강이 울란우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울란우데 최초의 주민들은 Evenks 족이었으나 그후 부랴트 몽고인들이 정착했다. 1666년에 러시아군 코삭이 들어와 보루를 건축했다. 몽고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고 중국과 몽고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0년에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들어오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으며 1880년에 3,500명의 인구가 1939년에 126,000명이 되었다. 몽고횡단 철로가 울란우데에서 시작되며 시베리아횡단 하이웨이의 일부분인 바이칼하이웨이도 이곳을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2010년 인구통계로 404,000명이 살고 있다. 2002년 통계로 러시아인 73.1% 부랴트족 21.4%, 또 다른 몽고족인 Tartar족 0.8% 우크라이나인 2.6%이다. 이 도시는 러시아의 티베트불교의 중심지로 경기도 안양시와 자매결연되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 소비엣 광장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레닌의 얼굴상이 세워져있다. 높이 7.7m에 총무게 42톤의 동으로 레닌 출생 100주년에 세워졌다.
부랴트 사람들은 주로 바이칼 호 주변에 살았던 몽고인들의 후손들이다. 부랴트인들이 러시아에 약 1백만명 정도가 될 것이라는 통계가 있다. 울란우데와 인근의 바이칼 호는 역사적으로 몽고의 땅이었다. 1689년 조약에 의하여 러시아 땅으로 합병되었다.
8월 6일 아침 하바로브스크를 출발 2박 3일 52시간 만에 3번째 기착지 울란우데 역에 현지시간 아침 10시 49분에 도착했다. 열차가 울란우데 역 프레트폼으로 서서히 들어오니 내 이름을 높이 쳐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Victorila Badmaeva 몽고계 혈통의 부랴트 족의 젊은 여성이다. 검은 투피스의 단정한 차림의 젊은 여성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송상천 선교사가 소개한 신학교 제자로 울란우데주립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울란우데에서 학교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까지는 3,700킬로나 떨어져 있으며 방학 때라 울란우데의 집에 와있었다. 학비와 숙소에 대하여 물었더니 신학교에서 무료로 제공한다고 대답했다.)
다음 행선지 이르쿠츠크 가는 시간을 변경하기 위해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여권과 기차표를 가지고 매표소로 갔다. 2층 외는 좌석이 없어 2층 침대를 택하니 얼마의 돈을 환불받았다. 2층 침대는 앉을 수가 없고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낮아서 불편하여 가격이 1층보다 저렴하다. 표를 교환하고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로 가 Maxi 라고 하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빅토리아가 다니는 교회에서 부목사 역할을 하는 43세의 백인 러시아인으로 부랴트여성과 결혼한 사람이다. Igor Igumnov 담임목사도 러시아 백인이지만 부인은 부랴트 여성이다. 그래서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부랴트 종족이라고 한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이미 예약이 되어있는 호텔로 향했다. 아침식사 포함 약 $70로 이곳에서는 비교적 좋은 호텔이다. 호텔 규모는 작아도 방이 크고 깨끗하여 마음에 들었다. 시베리아횡단 열차 여행을 하자면 열차표 시간과 호텔을 구하는 것에 각별한 주의가 요한다. 여행출발 수개월 전에 인터넷을 통하여 기차표를 이미 구입하고 호텔도 예약을 했다. 호텔 데스크의 여직원들은 부랴트 족으로 아주 친절하다. 체크인을 하면서 복도에 걸려있는 부랴트 종족들의 전통적인 옷에 관심을 보였더니 입어 보라고 하여 입어보았다. 평민들이 입는 옷이라는데 조선왕조시대의 고관들이 입는 옷처럼 화려하다. 일반적으로 오후에 호텔 체크인을 하여 아침에는 방을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시베리아는 비교적 아침에 체크인 하면 추가요금을 요청하는 곳도 있지만 추가요금 없이 받아 주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호텔에 오전 일찍 체크했는데도 추가요금을 받지 않았다.
며칠 열차 속에서 샤워를 못했기 때문에 샤워를 한 후 호텔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빅토리아와 멕스에게 나갔다. 정오가 지나 점심부터 먼저 하기로 하고 부랴트식당으로 갔다. 고급 식탁에 자리를 넓게 배치되어 식당으로서는 아늑하고 편안했다. 흥미 있는 것은 대형 스크린에 말들이 뛰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이 징기즈칸의 후예이기 때문에 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야채샐러드, 소 혀, 돼지고기, 양고기가 식탁에 올랐으며 부랴트족 특유의 요리인 양고기가 특히 일품이었다.
점심 후 울란우데에서 가장 알려진 관광명소의 하나인 불교사원을 향했다. 빅토리아는 남자친구를 도중에 픽업해도 되느냐고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가는 길 도중에 기다리다가 동승한 그 청년 Bulat는 빅토리아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생으로 역시 방학이라 집에 와있었다.
한국청년처럼 생겨 혹시 고려인인가 생각했으나 부랴트 종족으로 아버지가 울란우데에서 목회를 하는 개신교 목사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30분정도에도착한 Ivolginsky Datsun 사원은 러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불교사원이다. 비가 내려 비를 맞으면서 여러 사원 건물들이 있는 경내를 구경하면서 한국의 사원과는 다른 면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우선 건물들의 외모가 붉은 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 건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건물자체도 견고하지 않고 정교하지도 않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건물들이 스탈린시대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지만 불교 문화권을 접하면서 살아온 한국인인 나에게는 별 특징이 없는 사원 경내 구경은 큰 흥미를 돋우지 못했다. 비도 오고 1시간 정도의 구경만 하고 이곳을 떠났다. 울란우데에는 다른 여러 곳에도 사원들이 있다. 부랴트 사람들은 대부분이 불교신자로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빅토리아는 나에게 귀띔했다.
기독샬롬장로교회 (The Christian Presbyterian Church ‘Shalom’)
불교사원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시내외곽지대에 있는 기독샬롬장로교회에 들렸다. 멕심 부목사가 시무하고 빅토리아가 교사로 있는 러시아인 교회다. 부랴트공화국에는 1990년에 한국선교사 두 분이 잠시 있었다고 한다. 소련이 개방되었을 당시라 서방국가 여러 나라에서 이곳에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나 오래되지 않아 모두 떠났다.
샬롬교회는 한국에서 온 이창배 목사가 2003년에 개척하였다. 이목사는 선교센터를 완공한 후 우크라이나로 선교지를 옮겼다. 이 선교사는 그곳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현재 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 교회를 1년에 한번 방문한다고 한다.
2005년부터 Igor Alekseevich Igumnov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담임목사는 타지방으로 출타 중이었다. 교회재정은 외부에서 지원은 없으며 자체로 운영하고 있다. 교회를 외부에서 보면 큰 주택 같으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널찍한 예배실 친교실 부엌시설과 몇 개의 룸들이 있다. 출석교인이 아이들을 포함 100명이상으로 예배는 약 2시간 30분 정도의 긴 시간 진행된다.
찬양이 1시간 이상을 차지하며 예배가 끝나면 식사를 함께 하면서 친교를 한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2층에 교실들을 만들려고 공사 중에 있었다. 약 3천 스퀘어피트 정도로 보이는 2층을 모두 꾸미려면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할 것 같다. 2층 공사의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했더니 담임목사가 개인 자동차를 약 미화 약 5만달라에 팔아 공사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부목사는 말했다.
홈레스 사람들
빈곤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보기를 원했다. 빈곤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특별히 있지는 않으나 구 소비엣 시절에 지은 낡고 좁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빈곤층이다. 창문이 깨진 곳이 있는가 하면 빨래를 창문밖에 걸어서 말리고 있는 아파트도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새로 지은 아파트나 개인 주택을 가진 사람들이다. 시 변두리에 부자들이 사는 개인 주택들 중에는 맨션 같은 큰 집들도 있었다.
일반 서민들이 사는 소비엣 시대의 아파트 지역을 보면서 부목사 멕심은 주위에 홈리스들이 자는 곳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에도 홈리스가 있으나 미국처럼 많은 것은 아니며 극소수에 속한다. 멕스는 도시가스선이 있는 곳에 뚜껑을 열어 보였다. 가스선이 있는 움푹진 곳은 더운 열이 있어 겨울에는 홈리스들이 이곳에서 밤을 지낸다고 설명했다.
이 서민 아파트 옆 빈 큰 공간에 10여개의 야채상 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함께 다닌 일행 3명에게 각각 100루블씩 과일이나 야채를 사도록 하니 모두들 좋아한다. 한 사람당 $15 정도의 돈으로 이들을 기쁘게 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음날 열차 속에서 먹을 과일을 약간 장만했다.
울란우데 민속박물관 (Ulan Ude Ethnographic Museum)
야채가게에서 다음에 간 곳은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울란우데 민속박물관인 야외 박물관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이 지역 건축물들이 있는 곳으로 입구에서 입장료 45루불(약 60센트)을 지불한다. 대도시도 아닌 울란우데에 10개 이상의 각종 유형의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관광은 중요한 여행일정에 속하지만 시간 관계로 선택이 필요하다. 울란우데 체류가 하루뿐이라 다른 곳도 관광하기 위하여 야외 박물관은 대충 보기로 했다.
박물관 경내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운동장 같이 넓은 잔디밭이 있다.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오피스 모양의 단층건물이 있다. 러시아 귀족의 집으로서 소비엣 시대에 시베리아로 유배된 명사들이 수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안은 들어가지 못하여 외부를 보니 귀족 집답게 벽과 지붕에 각종 조각이 새겨진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예쁜 러시아정교가 서있고 그 곳을 지나자마자 유목민족이 살았던 유트(yurt) 텐트주택이 세워져 있다.
부랴트 종족은 몽고인으로 유목민족이었다.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 이 지방에 있는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각종의 새들, 곰과 호랑이들이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힘이 없이 우리를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고 누워서 다른 곳만 쳐다보고 있다. 호랑이나 곰들이 있는 우리가 너무 좁아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되었다.
이곳을 나와 마지막 관광지는 울란우데 시중심부다. 레닌의 기념비가 있는 시내 중심지 Sovetov Square 광장에 도착하니 오후 5시경이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고 기온은 70도 정도로 걷기에 상쾌한 늦은 오후다. 주위에 상가들을 포함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있으며 아름답게 꾸며진 광장이다. 정부청사 앞에 우뚝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닌의 얼굴상(머리상)은 소련 각처에 있는 레닌얼굴상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1970년에 레닌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동으로 된 이 머리가 자그마치 7.7m 이며 무게가 42톤이나 된다. 높은 대 위에 머리를 놓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공원을 압도했다.
초저녁 시간을 이 광장에서 보내고 저녁시간이 되어 부근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부랴트 식당으로 비교적 좋은 식당이다. 샬롬교회에서 만났던 교회 영어선생도 식당에서 합석하고 이 여성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식사가 들어오자 신학생인 부랴트 청년 Bulat 가 러시아어로 식사 기도를 한다. 모두가 열성 크리스천들이다. 모두가 영어를 사용할 수 있어서 부랴트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저녁 한때를 즐겁게 보냈다. 식당을 나와 호텔로 왔다. 모두 내가 있는 방으로 따라 들어와 함께 손을 잡고 원형으로 서서 부목사 멕스가 러시아어로 기도를 한 후 영어로 내가 기도를 하고 이들은 호텔을 떠났다. 잠을 자고 나면 바이칼호수가 있는 행선지 이르쿠츠크(Irkutsk)행 열차가 기다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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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진/변호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