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207) 제34대 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⑨

2018-05-18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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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et, ICBM, 인공위성 (계속)

Rocket 의 코에다가 폭탄 몇개만 걸어놓고 적국에 쏘아댄다면 엄청난 무기가 될것임은 보통 사람들도 어렵지않게 생각해낼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중동의 전쟁들에서는 rocket 이 매우 공포스러운 무기로써 쓰여지어 오고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엽인 1944년에 London 사람들은 독일이 연일 쏘아대는 rocket 이 “비오듯이” 쏟아져 혼비백산 하였었고 만일 독일이 rocket 탄을 조금 더 일찍 개발하였었 거나 아니면 조금 더 지속적으로 rocket 를 쏘아댔었다면 영국은 항복 할수밖에 없었을것이 었었다고한다. 영국왕궁도 rocket 의 위협은 피할길이 없어서 영국민들은 왕후에게 Elizabeth 와 Margaret 공주들을 데리고 Canada 로 피난하라고 했었었으나 왕후는 피난을 거절하고 London 시내에서 ambulance 를 운전하고 나서서 국민들을 감격시켰다는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V2 라고 불리우던 독일의 rocket 는 1톤짜리 폭탄을 싣고 비행속도가 시속 3,500 마일 이나 되는데다가 명중률도 높아서 영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었다고 한다. 독일은 Nazis가 집권한 1932년부터 Baltic 해에 있는 Peenemunde 라는 작은 어촌에 rocket 개발연구소를 설치하여 1944년에는 1만2천명이 rocket 를 생산해 오고 있었다.

독일이 패망해가고 있던 1944년 중반에 쏘련은 유럽을 가로 질러 독일을 점령하려고 맹진하고 있었다. 쏘련군이 장거리폭격기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Stalin 은 장차미국과의 대결에서 장거리 rocket 를 갖는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독일의 rocket 생산시설을 탈취하기 위하여 Peenemunde에 황급히 진격하였는데 한발이 늦었던 것이다.

최초의현대 rocket 를 완성한 미국을 인공위성 Sputnik 선제발사 성공으로 제압하는 쏘련
선견지명이 있었던 미국의 장군들이 “Paper Clip” 이라고 불리는 작전으로 독일의 rocket 연구소장 Wernher von Braun을 포함한 최고의 rocket 과학자 127명과 함께 V2 생산시설, 14톤의 문서들을 미국으로 한발 먼저 실어가 버렸던 것이다. 그 독일의 과학자들은 고스란이 미국의 rocket 과 우주여행 연구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고 von Braun은 종국에 미육군 rocket 연구소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과 쏘련은 신종무기로써의 rocket개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미국사람들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빗때어서 “rocket scientist” 라고부른다
전통원시적인 중국 폭죽도 화약만 충분이 넣어주면 1 마일쯤 올라가는것은 어렵지 않았었겠지만 진짜 공포스러운 무기가 되려면 큰 rocket 이 폭탄을 코에다가 걸고 높이, 아주높이 250 마일이 넘는다는 대기권 위로 치솟았다가 초고속도로 비행한후 목적지에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로 성능이 좋았던 engine 도 산소가 없는 대기권에 들어가면 작동이 않된다. 그래서 대기권에 진입해야하는 rocket 에는 연료외에 액체나 고체로된 산소통을동시에 가지고 가면서 연료를 태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rocket engine 원리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Robert H. Goddard 라는 32세의 미국 물리학자 이었는데 그가 1914년에 이 혁신적 rocket 를 발명하고 학술지에 이 rocket 로 언제인가는 인간이 달나라에 갈수 있게될것이라고 주장하자 아직 “미개했던” New York Times 등 저명한 언론들이 사설로써 Goddard 의 발명을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언론을 통한 여론의 조성으로 미국 “공군의 아버지”가된 육군항공대장 Billy Mitchell 장군과는 대조적으로 Goddard 는 1945년에 사망했을때 까지 언론기피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비밀스럽게 연구를 계속해서 rocket를 완전하게 발명하였으며 rocket의 개량으로 214개의 특허까지 받아내어 미국의 rocket의 우주여행이 가능하도록한 원조가 되었었다.

그런 와중에서 1956년에 쏘련의 공산당수장은 곧 쏘련군의 rocket 으로 세계의 어느 목표물 이라도 명중시킬수 있게 되리라고 공언하였다.


드디어 1957년 10월 4일에 쏘련은 Sputnik (“지구의 동반여행자”) 라고 불리우는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rocket 로 발사하였다. Sputink 는 총 184 파운드의 각종 기구들을 실은 “원시적”인 인공위성이었다. 그러나 미국민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세계인들이 아직 경악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 한달후에 쏘련은 이번에는 1,120 파운드나 되는 Sputnik II 호를 발사하였다. 더구나 Sputnik II 에는 무중력상태에서 동물이 생존할수 있는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개 한마리를 승선시켰다는 것이다. 쏘련은 이미 1953년에 수소폭탄을 성공적으로 시험한적이 있었다. 이제 쏘련이 인공위성을 대기권으로 쏘아 올릴만큼 강력한 rocket를 개발했다면 쏘련은 그 rocket 코에 수소폭탄을 달아서 미국에 보낼수도 있지 않은가? 미국사람들은 당황하였고 rocket 를 이용한 신무기 개발경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미국의 rocket 개발은 순조롭지 않았었다. 백악관은 1957년 12월 6일에 미국이 Vanguard rocket 를 써서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미국민 전부가 TV 를 통해서 이 열띠게 광고되어온 발사장면을 관찰하고 있는 가운데 rocket 은 쏘아보지도 못한 채로 물에 젖어있는 모래사장 위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 두달후에 드디어 미국은 최초의 미국 인공위성 Explorer I 을 발사하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미국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것” 은 둘째로 치드라도 미국이 “후진국”으로 생각해오고 있던 쏘련보다 훨씬 더 뒤져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라고 생각되었었다.

미국사람들은 쏘련이 미국보다 먼저 Sputnik 같은 인공위성을 개발한 것으로 보아 쏘련의 교육제도가 미국보다 분명히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Life magazine 은 연속 기획기사로 미국교육제도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회는 1958년에 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 를 입법하여 과학자들과 과학교사들의 양성을 위해 10억불을 쓰도록 하였다. 이 법으로 과학공부를 계속하려고 하는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 에게 학자금을 대출해 주도록 하였고 각급학교들에 연구실 기구들을 구입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Sputnik가 발사된 얼마후에 Ike 는 M.I.T. 총장을 과학과 기술담당 대통령 특별보좌관 으로 임몀하여 과학과 방위기술부문의 조언을 하도록 하였다. 1958년에는 이미 비대해진 국방예산에 40억불을 추가하여 rocket 와 missile 연구와 개발을 하도록 하고 외계정복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우주항공청인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을 신설하여 우주정복의 활동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기르던 소는 놓쳐 버렸지만 늦게나마 새 소를 잘 지키도록 새 외양간을 새로 잘 지었던 셈이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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