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추억-엄마와 지우개

2018-05-17 (목) 강희선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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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엄마와 지우개

강희선 샌프란시스코

몇 번의 이사에도 내 손길조차 닿지 않은 물건들이 있다. 부모님이 쓰시던 살림들을 물려 쓰며 불필요한 것은 버렸건만, 여전히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있다. 헌 가방 속을 뒤적이다 한동안 어떤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연필에 끼워 쓰는 지우개였다.

엄마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 있는 집안의 둘째였다. 첫딸에 이은 둘째 딸인 엄마를 보고 외할아버지는 “저 애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되뇌셨다 한다. 엄마는 아들 같은 딸 노릇을 한 것 같다. 집 장수였던 할아버지를 도와 많은 일을 했고, 전쟁과 가사 때문에 중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늘 공부에 대한 열망과 완고하신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외국 생활을 동경한 아버지를 따라 늦은 나이에 미국에 오신 후 한국을 그리워해 1년에 한 번씩은 아직 내가 살고 있던 서울에 오셔 한두 달 머물다 가셨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영어공부를 시작하셨다. 한국에 오실 때 배우던 책과 노트를 가져와 복습도 하고 모르는 것을 질문도 하시면서 열심이셨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들어와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하시면서 영어단어를 쓰고 또 쓰고 틀리면 연필에 끼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셨다. 그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 같아 엄마가 대견하기도, 귀엽기까지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사시던 엄마가 69세의 나이, 내가 미국 오던 해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딸들을 차별하신 완고한 할아버지를 원망하면서 2남 1녀의 장녀인 나를 아들과 차별하셨다. 내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면 더 좋은 성적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의 관심은 온통 장남인 동생에게 있었다.

어릴 때 그런 엄마에게 불만이 많았다. 마지막 한국에 오셨을 때 엄마의 모습은 기운도 핏기도 없이 마치 아기 같아 보는 내 마음이 아팠다. 엄마에게 살갑지 않은 내 성격 탓에 하지 못했던 말을 용기내서 했다. “엄마, 사랑해, 얼른 나아.” 엄마를 꼭 끌어안으며 말하니 “그래, 나도 사랑해.” 엄마도 대답하셨다.

내가 살아오면서 잘했다고 꼽는 것 중의 하나가 엄마에게 했던 이 사랑 고백이다. 부모라고 해서 처음부터 완벽할 수 있겠는가? 서운한 일도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것이 부모로서는 최선이었음을 아이들을 키우며 깨닫게 된다. 조만간 엄마가 계시는 산소에 가서 평소 좋아하셨던 가수 이미자의 노래 몇 곡을 틀어드리고 와야겠다.

<강희선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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