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싱가포르 이후

2018-05-15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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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대전 종전 직후 싱가포르는 전쟁으로 도로와 건물 항만 시설은 파괴되고 식량 부족으로 주민 대부분은 영양실조와 기아에 시달렸으며 공산주의자 무장 봉기와 파업이 그치지 않았다. 이 와중에 1959년 36살 난 변호사 리콴유가 인민행동당의 대표로 총선에서 승리,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됐다. 그는 좌익 무장 세력과 마약사범을 소탕하고 낮은 세금과 최소한의 규제, 친기업 친시장 정책으로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는 세계가 공인하는 ‘싱가포르의 기적’이다. 자원이라고는 항구 하나뿐인 이 나라의 작년 명목상 1인당 국민소득은 5만6,000달러로 세계 10위, 구매력 기준으로는 8만8,000달러로 세계 3위다. 이것이 2015년 사망할 때까지 실제로 싱가포르를 통치한 리콴유의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이토록 명확히 보여준 사례는 드물다.

그 싱가포르에서 6월 12일 미국과 북한간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회담에서 어떤 합의문이 나올 것인지는 그 때 가봐야겠지만 회담은 성공리에 끝날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 모두 회담의 성공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로서는 북한과의 회담 성공이 절실하다. 이를 통해 북한 비핵화의 약속을 받아낼 경우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했던 외교적 업적을 이뤘다는 자화자찬과 함께 수세에 몰린 판세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거기다 노벨 평화상도 유력하다.

만약 회담이 실패해 민주당이 연방하원 다수당이 되는 경우 탄핵은 물론 러시아 유착, 사법 방해, 포르노 배우 입막음 자금 출처 등을 조사하고 있는 특별 검사팀의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트럼프가 어떤 길을 택할 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김정은도 마찬가지다.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탄을 완성해놓은 그로서는 경제만 살리면 핵 경제 병진 노선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날이 목을 조여오는 대북 제재를 시급히 풀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하고 미국은 국교 정상화와 제재 해제 등을 약속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은 북한 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CVID) 폐기를 원하며. 이것이 이뤄지기까지는 어떤 보상도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이행할 의사가 있다하더라도 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역사상 유일하게 자진해서 핵을 폐기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 1989년 핵 폐기를 선언한 후 이를 이행하는데 2년 걸렸고 국제 원자력 기구가 검증하는데 다시 3년 걸렸다. 당시 남아공이 갖고 있던 핵무기는 달랑 6개였다.

북한이 갖고 있는 핵무기는 20에서 60개로 추산된다. 북한이 이를 포기한다면 이는 자발적인 포기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폐기와 검증 단계마다 최대한 시간을 끌려 할 것이다. 최소 수년이 걸릴 이 기간 동안 북한이 아무 보상도 없이 알토란같은 핵무기를 고스란히 미국에 바친다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핵무기가 몇 개고 어디에 숨겨져 있는 지를 김정은이 정직하게 신고할지도 의문인데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국제 사찰단이 극비 군사 기지를 수시로 방문해야 하는데 북한이 그 때마다 순순히 창고문을 열어줄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도 된다.

거기다 북한에는 우라늄이 풍부히 매장돼 있고 농축 기법은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와 북한 과학자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 제품을 전량 폐기한다 해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며 재생산이 가능하다. 김정은은 4.27 판문점 선언을 1주일 앞둔 당전원회의에서 “핵무기는 평화 수호의 강력한 보검이며 우리 후손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 높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확고한 담보”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걸 내려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게 핵을 포기하려는 사람 말처럼 들리는가.

싱가포르는 황무지에서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변모했으면서도 리콴유의 아들 리셴숭이 대를 이어 집권하고 있으며 그 아들 리훙이에게 권좌를 물려주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을 핵을 쥔 ‘제2의 싱가포르’로 만들려는 김정은의 싱가포르 드림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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