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니퍼 고의 바이올린

2018-05-04 (금)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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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타바바라의 성 안토니 채플에서 지난 27일 제니퍼 고(Jennifer Koh)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지만 너무 멀어서 가보지 못했는데, 아주 특별하고 훌륭한 연주회였다고 엊그제 LA 타임스에 좋은 리뷰가 나왔다.

그랬을 것이다. ‘광기의 나눔’(Shared Madness)이란 제목으로 제니퍼 고가 2년전부터 열고 있는 이 독주회 시리즈는 아름다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갖고 있어 음악계의 비상한 화제를 모아왔기 때문이다.

제니퍼 고는 몇 년전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바이올린을 잃게 되었다. 클리블랜드의 독지가가 대여해주어 15세 때부터 연주해온 1727년 스트라디바리우스, 세계 정상에 오른 그녀의 음악 커리어를 함께 쌓아온 동반자였다. 그런데 독지가가 형편상 팔기를 원했고, 결국 그 바이올린은 나중에 경매에서 한 중국인 소유로 넘어갔다.


다행히 제니는 얼마 후 에사 페카 살로넨의 도움으로 다시 좋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만났다. 그런데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덜컥 수백만달러의 론을 얻어 구입한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몇 년간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파산 지경에 이르게됐다.

바로 이즈음 구원처럼 또 다른 독지가가 나타났는데 오렌지카운티의 음반 사인회에서 만난 엘리자베스와 저스터스 슐릭팅 부부였다. 이들은 현대 작곡가들의 신곡 위촉을 많이 지원하는 음악 패트론이었고, 누구보다 신곡 초연을 많이 하는 제니에게 위촉비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제니가 바이올린 구입 때문에 처한 곤경을 알게 되자 부채를 탕감해주었으며, 그 엄청난 비용은 신곡의 위촉과 초연들로 갚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을까. 제니는 슐릭팅 부부에게 헌정하기 위한 새 작품의 구상에 몰두했고, 거기서 나온 프로젝트가 ‘광기의 나눔’이었다. 이것은 파가니니의 ‘24 카프리스’를 현대 작곡가들이 새로 쓰는 ‘21세기의 바이올린 독주곡’ 프로젝트였다.

‘24 카프리스’는 악마적 기교로 유명한 니콜로 파가니니가 자신이 구사하는 모든 바이올린 주법을 써놓은 24개 연습곡으로,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고난도 연주곡이다.

제니의 의도는 200여년전 작곡된 바이올린 테크닉의 최고봉을 넘어서 ‘21세기의 기교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현대 작곡가 24인의 바이올린 교본을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작곡가 30여명에게 3분짜리 바이올린 솔로곡을 ‘기부’해달라고 부탁했다. 거절하는 사람도 있을 것에 대비해 훨씬 많은 사람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32명이나 이를 수락했고, 결과적으로 더 다양한 작품이 모여진 대작이 되었다.

필립 글래스, 카이야 사리아호, 에사 페카 살로넨, 앤드루 노만, 데이빗 랭, 줄리아 울프, 존 하비슨, 매튜 오코인… 참여한 작곡가들의 이름을 보는 순간 제니퍼 고의 위상과 신뢰도가 읽혀졌다. 현대음악계에서 기라성 같은 이들이 그녀의 요청을 마다않고 새 작품을 써준 것이다.

너무 고마워서 “점심이나 저녁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한결같이 “연주만 잘 해달라”고 했다니, 음악 커뮤니티의 따뜻한 관용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들은 연주자에게 악기가 어떤 것인지, 재정적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탄생한 ‘나눔의 광기’는 2016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뉴욕 필하모닉 비엔날레에서 초연됐고, 이후 산타페, 신시내티, 시카고 등지에서 일부 연주됐으며, 지난 주 샌타바바라에서 이중 14곡이 미 서부지역에서 초연된 것이다.

제니퍼 고는 이 아름다운 사건을 ‘나눔’이라고 설명한다. 후원자의 친절을 나누고, 작곡가의 창조력을 나누고, 연주자의 음악적 경험을 나누는 일, 동시에 작곡가와 연주자의 나눔, 연주자와 악기의 나눔, 작품과 청중의 나눔이 커뮤니티 전체로 번져나가는 진정한 ‘광기의 나눔’이라 하겠다.

음악계는 이 작품에 대해 21세기의 최정상 작곡가들이 쓴 바이올린 기교를 모두 들어볼 수 있는 매스터피스라고 흥분하고 있다. 틀림없이 음반도 나올 것이고, 이곳 LA에서도 들어볼 수 있는 날이 머잖아 올 것이다.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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