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버라 부시 여사와의 추억

2018-04-28 (토) 12:00:00
크게 작게

▶ 신신자 / 워싱턴가정상담소 이사장

내가 바바라 부시 여사와 관계를 맺었던 것은 1984년에서 1988년까지이다. 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 대통령-부시 부통령 후보의 전국 한인 선거참모장과 88년 대선의 부시 대통령-퀘일 부통령 후보의 선거에서는 전국 아시안 총 선거참모장을 하면서 부시 여사과 개인적으로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 분의 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시 대통령은 부인 바바라 여사를 “Bar” 라고 부르면서 부부 사이가 각별했다. 바바라 여사는 첫사랑인 부시 대통령과 가정을 꾸미면서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후에도 한결같이 ‘가정적인 아내’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도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면 손 양탄자를 만들고 수를 놓으면서 손주들의 출생을 축복하곤 했다.

항상 그 분은 “가정이 원만하면 백악관도 잘 돌아간다”고 하면서 가족 구성원들의 인성교육이나 행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바바라 여사의 사진을 보면 항상 백발이었는데 자녀들 중에서 두 번째 딸이 3살 때 병으로 죽은 후로 백발이 되자 머리의 염색을 안 하고 그 딸과의 이별을 항상 생각하곤 했다.


바바라 여사는 가정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감각이 남다른 면이 있었다. 선거운동을 같이 다니면서 조용히 옆에서 조언을 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중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내가 담당한 선거본부의 스텝 중에 아시아 15개국을 담당하는 34명의 선거원들이 모여서 왜 자기가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서 일하는 가에 대해서 각자 의견을 말한 적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함께 경청했던 바바라 여사는 아시안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부시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대통령이 나에게 정치적으로 뭘 원하는가 물었을 때 나는 5월을 ‘아시안의 달(Month of Asian American)’로 선정해 달라고 부탁했고 쉽게 허락이 됐는데 이것은 부시 여사의 조언도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한없이 인자하고 가정적이면서도 엄격했던 그 분의 별세 소식을 들으면서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