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월과 환자와…

2018-04-28 (토)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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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만 더 보태면 시카고에서 반세기를 살아왔으니 시카고 토박이이다. 그런 나에게 LA의 한 친구는 “왜 지옥 같은 시카고에서 여태껏 사느냐? 당장 이리 이사 와라”하고 전화로 권하곤 한다. 시카고는 날씨는 그리 좋지 않지만 4 계절이 확실하고 사람들도 상당히 보수적이라 살기에 별 불편을 못 느끼고 있다.

시카고의 4월은 최근 뉴욕 증시마냥 심히 요동치고 있다. 이틀 전에는 70도 화창한 봄날이더니 오늘은 30도의 눈비 날리는 추운 날이다. 4월에 겨울코트를 벽장에 넣으면 이곳에서는 4 월의 바보(April fool)로 취급을 받는다.

쌀쌀한 4월의 어느 날 집 근처 공원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우주의 시간에 준하면 70 평생은 찰나에 지나지 않지만 내 시간의 기준으로 치면 아주 먼 인생 여정이다. 그 긴 삶의 여정에서 겪었던 여러 사건들,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형상이 뇌 속 깊게 묻혀버렸는지 어떤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은 기억중추인 해마의 수많은 뇌세포에 일종의 암호로 저장되어 있다. 불록체인 같이 암호로 저장되어 있는 기억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는 해마와 편도체를 자극시켜야 한다. 동시에 스트레스를 줄이고 규칙적 운동을 해야 암호를 풀어내는 능력이 높아진다.

공원 주변 군데군데에 수선화와 들꽃들은 피어 있지만 큰 나무들은 아직도 거무스레한 나목차림으로 서있다. 대뇌 후두엽에 각인된 나목의 잿빛 검은 색의 시각영상은 감각의 연합중추인 대뇌 두정엽에서 다른 감각들과 섞여 해마로 내려 보내진다. 그런 과정에서 우연히 옛 환자를 생각나게 했다.

모자로 부터 상의와 하의, 운동화까지 온통 검정색으로 치장하고 오피스를 찾아오는 젊은 남자였다. 유달리 검은 색을 선호했던 그에게 한 번은 왜 검정색만 입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마음 속 색깔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며 히죽이 웃었다.

40여 년 전 오늘처럼 눈비 내리는 밤에 그는 검은 재킷을 걸치고 검은 운동화를 신고 검은 개를 데리고 어두운 거리를 산책하다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어 죽었다. 모든 게 검어서 아마 운전자 눈에 띠지 않았던 것 같다. 사고를 당하기 몇 달 전 여자친구로부터 걸려온 절교전화로 우울증세가 심해져 치료를 받고 서서히 좋아지고 있었는데 변을 당한 것이었다.

우리의 감정과 색깔과의 관계는 심리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색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빨강은 정열적이며 희망을 추구하는 긍정적인 색이고, 파랑은 불안을 잠재우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신뢰와 우정의 색으로 알려져 있다. 검정은 죽음, 밤, 악마 등 부정적 면과 장엄함과 고행의 긍정적 면도 가지고 있어 수도사, 장례식, 사형집행자의 예복으로 사용되는 색이다.

어느 정신분석학자는 검은 색을 인생살이가 고달플 때 돌아가고 싶은 컴컴한 어머니 자궁 속의 상징으로도 설명한다. 색깔은 또한 유행을 탄다. 서양에서는 반세기 전에 파랑이 여성적이라 해서 여성들이 선호했고, 핑크는 남성적으로 남자들이 좋아 했는데 세월이 지나며 자연히 그 반대가 되어버렸다.

봄철은 우울증 환자들에겐 잔인한 계절이다. 다시 찾아온 생명의 봄 향기에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자신은 왜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지 더 서글퍼지고 깊은 실의에 빠진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세가 악화되는 봄과 이른 여름에 눈을 부릅뜨고 환자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줄곧 노랑을 좋아하다 말년에 검정에 심취했던 후기 인상파 화가 고흐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검은 옷 입고 어두운 밤에 밖에 나가 죽음을 당한 환자를 경찰은 단순사고로 귀결했다. 생명보험 문제로 가족들이 우겨 그렇게 했지만 자살일 가능성이 많다.

또 어두운 과거를 지닌 까뮈가 자기가 쓴 책이 잘 팔려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인생살이에서 겪게 되는 외로움과 갈등 속에서 앞의 환자와 까뮈와 고흐는 자신들만의 삶을 추구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관습에 따르기보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죽고 싶은데서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들 모두 무의식 속에 아마 자살소망이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고나서야 이방인의 신세에서 떨쳐 나와 자유와 행복감을 느꼈듯이 환자, 고흐, 까뮈 또한 자살소망을 이룬 뒤에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 기분이 아니었을까?

4월을 맞아 지구촌을 떠난 환자를 떠올리며 시카고와 까뮈와 고흐와 그리고 ‘이방인’ 소설 속 주인공을 연관시켜 보았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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