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지막 레이건주의자

2018-04-16 (월)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CNN‘GPS’ 호스트 예일대 졸,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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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레이건주의자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CNN‘GPS’ 호스트 예일대 졸,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폴 라이언 하원의장의 은퇴 결정을 많은 사람들은 공화당이 올해 중간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신호로 풀이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언의 퇴장은 당 내부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레이건 혁명이 종말을 맞았다는 표시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공화당은 화이트칼라에 속한 전문가들과 컨트리클럽 비즈니스맨들을 주축으로 하는 ‘기업들의 정당’이었다.


낮은 세금과 규제 철폐, 재정적 책임감을 강조하는 등 지향성도 상공회의소와 일치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의 기본방향을 고집스레 따라 가는 소수정당이었다.

루즈벨트가 20세기 중반의 미국 정치판에 남긴 흔적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역사적 팩트(fact) 하나를 살펴보자: 1933년부터 1969년까지 백악관에 입성한 공화당소속 정치인은 FDR(프랭클린 시어도어 루즈벨트)과, FDR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그가 직접 발탁하고 중용한 군 장성 출신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전부다.

1969년 백악관에 들어갔을 당시 리처드 닉슨은 이미 상당수준의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닉슨은 거의 반세기 동안 진보주의자들이 독차지했던 연방정부에서 자신만이 유일한 외톨이 공화당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외정책 측면에서 공화당은 1950년대에야 비로소 고립주의적인 자세에서 탈피했으나, 당시에도 여전히 국제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공화당은 민권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이고 행동주의적이었다. 공화당 주지사 출신인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은 흑백격리 수업을 금지하는, 헌정사에 한 획을 긋는 이정표적인 결정을 내렸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를 집행하기 위해 아칸소 주에 연방군을 투입했다.

닉슨은 당의 첫 번째 변혁의 시작을 맞아들인 인물이다. 공화당은 오랫동안 민족주의자이자 이민배척주의자(nativist)적인 측면을 유지했다. 그러나 민주당 소속인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민권운동을 수용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대의 반전 중 하나를 이끌어낼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로써 이전까지 짐 크로우 사우스(Jim Crow South)의 정당이었던 민주당이 민권정당으로 자리를 잡은 반면 링컨의 정당인 공화당은 연방정부와 민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남부 백인들의 부정적 정서를 집중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정치의 다른 영역에서 닉슨은 진보주의자의 입장에 섰다. 그는 환경청(EPA)를 신설했고, 민주당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관리했으며 “지금 우리는 모두 케인즈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이건은 닉슨이 시작한 일을 완수했다. 그의 지도 아래 공화당은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을 지지하고 제한적인 정부와 해외로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등 확고한 이념적 방향성을 지닌 정당으로 변모했다.

컨트리클럽 공화당원들은 기퍼(레이건)와 조지 H.W. 부시 당시 부통령의 연합이 보여주듯, 선거승리 이후 당에 대한 레이건의 재정의(redefinition)를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확실히 수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공화당을 유사자유의지론자 조직(quasi-libertarian organization)으로 규정한 레이건의 재정의는 사회적 보수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긴 했지만 클린턴 시대를 거치며 그대로 유지됐다. 공화당 지도자들과 당의 공식 이념은 레이건주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공화당이 변했고, 유권자들이 끌리는 당의 핵심 이념이 경제가 아니라 민족주의, 인종과 종교 등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챈 듯 보인다.

그가 내놓은 첫 번째 중요한 정치적 주장은 엉뚱하게도 오바마 대통령을 케냐에서 태어난 무슬림으로 몰아세운 버서리즘(birtherism)이었다.

201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선 트럼프는 유세장 단상에서 레이건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한 유일한 후보였다.

그는 모든 형태의 복지제도 개혁을 거부했고, 미국의 대외문제 개입과 제 3국에 대한 민주주의 전파노력을 비난했다.

시장경제 측면에서 그는 대규모 기반시설투자에서 전국민 의료보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진보적 아이디어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 무역, 인종과 종교 등 몇 가지 핵심 이슈에 대해 그는 줄기차게 강경노선을 고수했다.

이 외에도 그는 터프한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 노선을 추구했고, 반 이민과 반 무슬림, 친 경찰 노선에 집착했다.

강력한 아웃사이더인 그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능력 있는 16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는 상원의원, 주지사와 싱크탱크 등 공화당 지도자의 상당수가 공유하는 이념이었지만 이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극히 드물었다.

2016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모두가 트럼프의 패배를 예상했고, 폴 라이언은 다른 공화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유롭게 트럼프와 거리두기를 시도하라고 조언까지 했다.

의원들에게 트럼프를 멀리해도 좋다는 훈수전화를 건 후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라이언 하원의장의 지지율은 20포인트 가까이 급락했다. 예전보다 나이 들고, 교육수준이 낮은 백인들이 주축인 지금의 공화당 지지기반은 라이언이 아니라 트럼프에 동조한다.

라이언은 많은 결점을 지녔다. 재정적 청렴성(fiscal probity)을 옹호하면서 예산적자를 폭발적으로 늘린 그는 레이건주의의 위선을 체화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수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케어를 폐기하지 못한 형편없는 입법 전략가이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열성 레이건주의자였다.

그의 후임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공화당의 두 번째 변혁은 이미 완성된 상태다.

<파리드 자카리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CNN‘GPS’ 호스트 예일대 졸,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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